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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큰 성 바벨론의 운명

본문 / 14: 8

 

1. 세상

우리가 보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운명을 폭로하는 책입니다. 왜 세상에는 아무런 기대를 두어서는 안 되는지 또 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말씀하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리스가 영화롭게 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일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도 그리스도가 기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요한복음 178절의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17:8)라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알게 하신 말씀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둠의 세상에서 명확하게 구별된 삶으로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곧 영생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을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영생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입니다. 영생에 마음이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생만 주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기보다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소위 복을 주는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필요성도 없는 영생은 나중에 죽고 나면 그때 가서 주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시고, 우선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것을 알고, 영생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자연히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전부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길로 여기고, 진리로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들의 인생을 험악하고 피 흘리는 곳으로 이끌어 간다고 해도 주님이 가신 길이 바로 그 길이었음을 알기에 자신으로 하여금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곧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비록 그리스도를 말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가장 잘 믿는 것처럼 떠든다고 할지라도 거짓된 모습은 분명 드러나고 맙니다. 즉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는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는 세상에 대해서는 실패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은 분명 세상적 시각으로 볼 때는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 세상이 원하는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가를 뽑는다고 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겠습니까? 경제 성장입니다. 짧은 시간에 놀라울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가 모범적이고 본받을만한 나라로 뽑힐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성공이며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모범적인 교회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모범적인 교회는 짧은 시간에 많은 교인을 끌어 모은 것입니다. 그 후에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성장입니다. 성장이 곧 성공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교회는 곧 성장한 교회'라는 공식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 박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역시 성장과 연결 지어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교회 성장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전도를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기 교회를 확장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과연 십자가가 높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십자가를 주님의 희생과 사랑이 증거된 현장이라고 열심히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의 그 희생과 사랑이 자신들에게서 실천 되어지기를 원하고는 있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힘이 중심이고, 힘은 곧 성장했을 때의 결과이니만큼 세상에서 모범적인 국가는 성장한 강대국이고, 모범적인 회사 역시 성장한 회사이고, 모범적인 교회 역시 성장이 그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생이니 믿음이니 십자가니 하는 것들은 환영받지 못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장에 별 필요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장 자체를 진리로 여기고 살아가는 이러한 세상을 의미하는 말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2. 바벨론의 관심

오늘 본문을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14:8)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큰 성 바벨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 역할은 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할 때 쓰신 도구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때리는 막대기로 바벨론을 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남쪽 이스라엘이 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요한계시록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처음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계시록에서 등장하는 바벨론이 구약에 등장하는 바벨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약에서의 바벨론은 실제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벨론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세상 모든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인 7절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을 때 과연 누가 심판을 받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그 심판 받을 대상이 바로 큰 성 바벨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하는 이 말씀이 바로 심판받을 대상은 바로 바벨론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말한 대로 구약에 등장한 실제 국가로서의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바벨론 외에 다른 국가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바벨론은 세상 모든 나라를 의미한다고 할 때 결국 세상 모든 나라는 무너진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의 현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을 때 인류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살아가는 신자에게 세상은 무너질 역사를 안고 사는 운명에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세상의 중심이 국가이고 힘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은 성장한 국가나 강대국인 국가를 본받을만한 국가로 여깁니다. 구약 당시 바벨론은 강대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강대국을 도구로 삼아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돌아오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핍박을 합니다. 결국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서 이스라엘이 이방인에 의해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이방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언약입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가 이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벨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에서 벗어난 자체가 저주이기 때문에, 이방인인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치면서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 속에 있음을 확인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도 아니고 힘도 아니고 오직 여호와의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여호와의 언약 안에 들어있는가에 있을 뿐입니다. 국가가 성장하고 남북이 통일하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여호와의 관심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문제들이지 여호와의 언약에 포함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묻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문제가 곧 하나님의 문제라는 생각은 버리셔야만 합니다.리가 밥을 굶든, 세상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근심을 하든 그러한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근심이고 고민이고 염려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는 그러한 근심 걱정과 염려가 없습니다.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이미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의 언약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가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들의 문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들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관심사에만 관심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그 사랑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지 결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이 멸망 당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벨론을 '큰 성'이라고 말합니다. 바벨론을 큰 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강하고 강대국이고 힘이 있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바벨론에서는 힘을 얻기에 도움이 되는 것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반면에 성장하고 힘이 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받게 됩니다. 그러한 취급을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고 그 언약대로 오신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받는 것입니다.

 

3. 바벨론이 하는 일과 신자

오늘 본문을 보면 바벨론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 대해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음행을 하도록 했고, 그로 인해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이 세상에 제공한 것은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치 않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정신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바벨론이 세상에서는 최고의 모범적인 국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은 세상의 운명이 어떻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벨론을 모범적인 국가로 바라봅니다. 바벨론처럼 큰 성으로 성장하는 것에 모든 목표를 두고 살아갑니다. 바벨론처럼 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바벨론처럼 되기 위해서 성장에 필요한 것 또는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바벨론이 세상에 제공한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무시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며 또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교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누구나 교회를 개척할 때 소망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빨리 100, 200, 1000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소원일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와 소원을 두고 교회를 바라볼 때 그런 자에게 가장 모범적 교회는 빠른 시간에 성장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과연 어떻게 해서 저렇게 성장을 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제자훈련을 했다면 자신도 제자훈련을 하려고 할 것이고, 큐티를 했다면 자신의 교회도 큐티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가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것이 뭔가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 도움이 되는 방법만이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결국 어느 큰 교회가 '제자훈련을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고 모든 교회로 하여금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바벨론적 사고방식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만 왕으로 섬기면 되는데 바벨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여기에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1. 벨사살 왕이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2.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3.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 4. 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 구리, ,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5:1-4)고 합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이 잔치를 할 때,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가져왔던 성전의 기물을 술잔으로 이용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신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필요치 않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바벨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약 가운데 있는 신자는 어떤 자입니까? 성장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제대로 섬기며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왕이 되고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진리이고 생명임이 증거 되는 것에만 소원을 두고 사는 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신자입니까? 과연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사는 신자라면 그 모습은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신자라면 분명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를 섬기는 모습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 역시 바벨론이 제공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물론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성장과 부흥을 목표로 삼아버렸기 때문에 결국 성장과 부흥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남은 자 된 여호와의 백성은 자신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운명이 어떠한가를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에 부러움이 가기보다는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 형제들이 부러울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보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이라고 말씀합니까?

 

2. 그리스도에 관심이 없는 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의 기도는 어떻게 다르다고 말씀합니까?

 

3.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그 중심은 무엇이라 하며 그 결과 무엇을 가장 본받고 모범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까?

 

4. 오늘 본문에서 무너지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5. 이방 나라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다고 합니까?

 

6.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다르며 또 그 다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드러나는 일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은 무엇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까?

 

8.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대로 오신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치 없게 취급받게 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바벨론이 세상 모든 나라에 제공한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바벨론과 달리 언약 가운데 있는 언약 백성은 어떤 자라고 말씀합니까?

 

11.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것이 잘못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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