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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임금 되기를 거부함

본문 / 6:15

 

1. 임금 삼으려는 이유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으로 존귀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존귀함을 인정하지 못하고서는 믿음을 언급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높인다고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속마음을 깊이 살펴봐야 하는 것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존귀하게 여기며 높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높인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신자들에게서 높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사실 우리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존귀함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단지 피가 흐르는 비참의 현장일 뿐입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존귀하다는 것은 십자가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를 보지 못하고서는 십자가의 존귀함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높인다는 것은, 분명 말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찬송을 부르거나 율동을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를 높입니다라고 떠든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는가는 삶을 통해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존귀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심령에 자리하고 계신다면 그 증거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그 흔적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빌립의 답변과 그리고 어린아이가 소지하고 있던 오병이어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는 안드레의 말을 통해서 극히 현실적인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제자들의 수준이었음을 살펴봤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나, 어린아이가 소지하고 있는 오병이어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눈앞의 문제를 현실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는 그들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분명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여겼던 것이 제자들의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 앞에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이적을 베푸신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먹이고 배부르게 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걸림돌은 십자가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 문제에 있어서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대접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결코 존귀한 것으로 대접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6:15)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겠다는 그들의 열심에 대해서 예수님은 산으로 피해버리십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그들의 의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본문에 대한 이해는 끝난 것입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한 이유를 알았으리만큼 우리는 그들과 같은 의도로 예수님을 찾지 말자는 답을 내리면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 삼으려고 한 사람들의 의도를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은 나의 왕이라고 악을 쓰면서 노래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왕이라면 그리고 우리는 왕의 신하이고 종이라면 우리는 종으로서 왕에 대한 자세가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럼 왕에 대한 종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러한 종의 자세가 우리에게서 보여지고 있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예수님과 원수된 자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져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고,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굳이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셔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산으로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임금이 되어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계속 베풀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심을 증거 했더라면 좀 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그러한 생각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우선 교회로 모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교회로 모이면 복음을 들을 수가 있고, 복음을 듣다 보면 그리스도를 믿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하게 되는 것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돈을 들고 가는 떡과 복음 선교입니다. 일단 교회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을 교회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을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이 정당하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피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일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을 원하기보다는 먹을 것을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있다면 모이겠지만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모일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귀함을 안다면 그가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모아서 교인으로 만드는 교인 양성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만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확인하고 교통하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돈도 먹을 것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보지 않고 모이기 때문에 돈 있는 자가 높임을 받을 수도 없고 또 높임 받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원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온전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보다도 돈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면 그 교회에서 높임을 받는 것은 돈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중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돈 없는 사람은 나도 돈 달라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의 왕이 되기를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임금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과연 예수님을 원하는가?’에 대해서 자문하며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단지 교회를 다니고 있고, 또 스스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한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나는 떡을 보고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원하는지의 여부는 우리의 삶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면 왕을 섬기는 종의 자세는 삶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라고, 즉 주인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인 되신 예수님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종은 주인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뜻과 주인의 일을 행하며 사는 사람이 종입니다. 그런데 만약 종이 주인에게 나에게 이것을 해달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결코 종의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주인님이라고 불렀다고 할지라도 주인에게 자기를 위해서 뭔가 해주기를 원한다면 결국 주인을 자신의 종으로 여긴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임금 되기를 거절하고 산으로 가신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배고픔을 위해서 뭔가 해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입으로는 임금이라고 하면서도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배를 위한 임금이 돼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예수 이것이 예수님을 종으로 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 있습니다. 주인이 종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자인 우리가 분명 그리스도의 종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주인이시고 왕으로 존재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정한 종인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형편이 배고픔이 되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했다 할지라도 그것까지도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쓰여지고 있는 순간임을 안다면 얼마든지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주님의 뜻을 묻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기를 힘쓸 것입니다. 내가 고통당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19:27)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오늘 본문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면 모순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대로 한다면 분명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오히려 임금 되기를 원치 아니하던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도 누가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 됨을 원치 아니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대로 한다면 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왕이 돼달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그들의 왕을 원한 적이 없음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원한 것입니까? 그들은 왕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줄 종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전락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말하고 왕이라고 하면서도 종이 왕에게 나와서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며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자세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날 위해서 이것을 해달라는 요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예수는 나의 왕이라고 외치면서 노래 부르고 율동을 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당초 예수님을 왕으로 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원수라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오직 한마음으로 예수님을 원하십니까?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힘이 안 된다고 해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존귀히 여기며 살기를 포기하지 않겠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하신 것은 사람들의 요구대로 떡이나 만들어서 육신의 배를 불리게 하는 종으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면서도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것을 잘 들어주는 충직한 종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고 이루어줄 것만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절대로 예수님이 왕 됨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의 원수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신자의 삶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진정한 종의 자세로 사는가를 생각하셔야만 합니다. 진심으로 종의 자세가 우리에게 있는지 살펴야만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예수님을 우리의 종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우리가 왕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왕의 자리로, 우리는 그 왕을 섬기고 왕을 위하는 종의 자리에 돌아와야 합니다. 종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종의 자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왕되신 예수님이 죽으라면 죽고 망해라 하면 망하는 종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이 왕 되기를 원하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성공도 돈도 봐서는 안됩니다. 보인다면 우리 같은 자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희생이 보여져야 하고 왕이 종을 섬기는 섬김을 봐야 합니다. 그럴 때 종된 신자는 왕의 섬김 앞에서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 앞에 굴복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말하면서 왕되신 예수님이 하찮은 종된 우리를 섬기는 섬김 앞에 굴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러한 희생과 섬김에 굴복한 그들이 바로 종이며, 그들이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섬김과 희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섬김과 희생에 굴복하고 다스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은 우리들의 힘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굴복한 종에게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의의 열매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하루하루를 진정한 종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이익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것인가?’를 묻고 되새기면서 오직 예수님이 높여지는 길로 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사는 종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오직 왕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로 인해서 항상 맺어지는 것은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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