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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도의 인내

본문 / 14: 9-12

 

1. 불안한 삶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말은 전도할 때도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우리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는 것은 교회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보면 믿음으로 인해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분들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는 상관없이 항상 불안과 공포와 염려와 근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불안과 공포와 염려와 근심입니다. 두세 사람만 모여도 걱정이 튀어나오고, 불안과 염려가 그치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으로부터 떨쳐 버릴 수 없는 뭔가 운명의 끈으로 붙들려 있는 관계인 것처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불안과 공포와 염려와 근심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애를 써도 결국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들입니다.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때는 불안 대신 평화가 찾아온 듯했는데 다시 세상을 대하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서 이러한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자신의 기대감이 서로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상황이 자신의 기대감을 충족 시켜주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에 불안과 염려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불안과 염려란 자기 삶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기대는 가지고 있는데 그 기대를 충족시킬 여건이 충분치 않을 때 불안하고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강이란 환경의 개선이나 전환에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기대감을 포기하는 데서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남겨 놓으실 때는 하나님의 의도가 따로 있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원하는 삶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이란 우리가 기대하고 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것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공해주신 것을 얻어먹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강을 누리며 사는 정상적인 신자의 모습인데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꿈과 기대감을 가지고 그리고 손수 그것을 이뤄보려고 함으로 인해서 불안과 염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이 제공하신 것을 얻어먹으며 살아간다면 삶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주문한 것이 전혀 없이 단지 주신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주문하며 살아감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며 사는 평강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일에 더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로 인한 불안과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불안과 근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 생존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힘 있는 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받기 위해 허리를 굽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며 사람들이 만든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진노

오늘 본문 9절부터 보면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14:9-10)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천사의 음성은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입니다. 즉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시편 7장에 보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7:11)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매일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겠습니까? 성도들이 기도를 안 해서입니까? 아니면 성경을 보지 않아서입니까? 하나님의 분노는 세상으로 인해서 유발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존하고자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소망을 완성하고자 하는 그 행위로 인해서 하나님의 분노가 유발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들이 서로 힘을 모아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그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의 힘으로 스스로 생존하고자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것에 전력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뜻이 하나하나 성취되어지는 것만이 행복이고 즐거움이며 삶의 목표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항상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 성취되어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기 싫은 것을 짐승이 강제적으로 표를 줬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것은 스스로 원한 것입니다. 스스로 짐승과 우상에게 나와서 표를 받은 것입니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존재인데 세상에서 강한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다. 8절에서 등장하는 큰 성 바벨론 같은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영웅을 좋아하고 강자를 선호합니다. 영웅을 중심으로 모이고 영웅을 만들기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린 구세주도 바로 이러한 영웅이었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어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영웅을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자신들이 기다리는 영웅 같은 존재를 보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아들로 왔다고 스스로 자처한 사람의 조건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영웅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배척을 받은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영웅 같은 구세주를 통해서 자신들도 강한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세상이 영웅을 원하는 것도 그 영웅을 통해서 자신들도 강해지고 싶다는 바램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능력 있는 지도자나 능력 있는 대통령을 원합니까? 그것은 그로 인해서 자신도 잘살고 싶다는 바램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웅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짐승은 강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바벨론 같은 온 국가가 선호하는 강대국의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러한 강대국을 사람들이 싫어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자 덕분에 자신도 득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결국 짐승과 우상을 경배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생각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익을 얻어내는 쪽으로만 향합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의 득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짐승이 좋아서 스스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짐승이 곧 강자 되고자 하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해줄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또한 부자가 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과연 누가 부자 되기를 거부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출세하고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출세와 성공을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힘을 모으는 것이 곧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에 머리 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겠다고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성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승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짐승이란 이러한 사고방식의 집합입니다. '하면 됩니다. 된다는 믿음으로 우리 한번 힘을 모아서 해 봅시다'는 생각들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대로 받아 산다는 것은 믿음이 없고 나약한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한 대로 주시는 분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원하는 것을 기도하지 않고 그냥 주시는 것만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약한 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믿음이며 강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행위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강자나 약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다만 많이 주어진 자와 적게 주어진 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만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원칙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할 이유가 없습니다. 강한 힘이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에 짐승에게 스스로 나와야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이미 신자에게는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자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자기의 포부와 자기 욕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포부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만을 얻어먹고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도움 되는 것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굴복하고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3. 신자

세상이 영웅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세상 자체가 짐승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강자를 원하고 약자는 밀쳐내는 곳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지만 참된 성도의 삶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14:11)고 말씀합니다. 짐승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쉼이 없습니다. 항상 불안과 염려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포부와 욕망이 식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 자신이 이룬 것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힘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란 그날그날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만 원이 있으면 그 주신 만원으로 감사하고, 내일 십만 원이 있으면 그 주신 십만 원으로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다. 벌려고 애를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것으로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승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의 신자의 인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4:12)고 말합니다. 신자란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말씀과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강자가 대우받고 높임 받는 세상에서 강한 힘은 돈에 있고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있고 믿음에 있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에 남겨 놓으신 이유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삶입니다. 돈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인내인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믿음이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조차 환영받기가 매우 힘든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환영하지 않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마음에 두고 지키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계시록 1310절에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10)고 말씀합니다. 힘을 거부하는 말씀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면서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돈을 벌어서 복수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의 인내는 부잣집 앞에서 그냥 거지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지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 이것이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인내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삶이 세상의 삶의 방식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가를 압니다. 참된 성도는 세상에서의 삶의 불편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남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날마다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고 합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세상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런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우리의 실체이며 또 이것의 우리의 믿음이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빠지지 않고 그런 것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이며 또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한다고 합니까?

 

3. 오늘 말씀에서 평강을 누리는 신자의 모습은 무엇이며 그에 반해 신자임에도 불안과 염려에 빠져 사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든 종교 생활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는 무엇 때문에 유발된다고 합니까?

 

6. 오늘 본문에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합니까?

 

7.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짐승이 강제적으로 받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은 것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짐승과 우상을 경배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9. 짐승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자와 신자의 원칙적인 모습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10. 신자가 우상을 경배할 이유가 없는 까닭과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자들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11.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받은 자가 쉼이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2. 신자를 세상에 남겨 두신 까닭과 성도의 인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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