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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복

본문 / 14:13

 

1. 말씀과 상관 없는 삶

창세기 2장에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죽는다는 말은 아담에게는 생소한 말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 바로 죽는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담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즉 인간의 끝에 대해서 미리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세상이 무엇으로 창조되었고, 무엇에 의해서 유지되는가를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인간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호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인간의 힘에 의해서 세상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힘으로 안 되니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날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최선이 자신이 기대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이 따로 존재하고 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따라서 창조물이 말씀과 상관이 없어진다면 창조의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처음은 흙입니다. 흙이었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된 존재가 말씀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말씀의 능력과 단절된 상태가 된 것이고 말씀의 능력이 사라져 버린 인간이라면 결국 처음의 상태, 즉 흙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 3장에 보면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9)고 말씀을 한 것입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즉 너의 처음은 흙이니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마지막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다는 것은 결코 인간은 마지막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 마지막을 아는 자입니다. 인간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마지막은 무엇으로 인해서 온 것인지를 아는 인간이 지혜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인간의 끝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고 말합니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한 것은 결코 끝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만 먹으면 끝이 아니라 현재의 성공만이 너희를 기다릴 것이라는 말로 인간을 유혹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끝을 보는 대신에 하나님 같이 된다는 현재의 성공을 바라봄으로 인해서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씀의 능력 아래 있지 않는 인간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과연 인간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라보고 사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오직 현실입니다. 마지막이 어찌 되었든 관심 있는 것은 현재의 성공이며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을 시작으로 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끝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인간도 피해갈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것이 끝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보다는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현실에 집착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영광이 되는 것을 얻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거부하겠다는 것이 욕망에 끌려가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인간의 끝을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인간에게 끝이 있음을 알고 그 끝이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는가를 마음에 새기면서 인생의 끝에 서서 현실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고 희망적이지 못하고 발전적이지 못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끝을 언급하면서 삶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느냐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끝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삶에 대해서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것이 소망하고 살아가는 삶, 이런 삶을 사는 자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오늘 말씀 앞에 선 우리들의 삶이기를 바랍니다.

 

2. 주 안에서의 삶과 죽음

오늘 본문에서도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고 말씀합니다.

여기 "지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다"는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죽음에 대한 평가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습니다. 심장이 멈추고 숨이 끊어짐으로서 육신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몸은 땅속으로 묻힙니다. 이러한 죽음에는 구별됨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은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둘로 구분합니다. 육신의 기능이 정지된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죽음과 주 밖에서의 죽음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주와 관계된 죽음 그리고 주와 단절된 죽음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자들이 회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죽음은 곧 불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대로 생각한다면 죽음은 기쁨입니까? 슬픔입니까? 기쁨입니다. 복이란 사람들에게는 기쁨이기 때문에 주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라면 그것은 곧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안에서 죽는 것은 복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기겁을 하는 것이 현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세상과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소망과 희망과 기쁨이 모두 세상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말은 '예수 믿다가 죽으면 천국 가니까 복이다'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지나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대해서조차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단지 교회 다니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 갑니다'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예수 믿고 죽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주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과연 주안에서 죽는 자입니까? 세상은 날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교회를 다니다가, 소위 예수를 믿는다고 하다가 죽은 자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들 모두가 주안에서 죽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을 판단할 분은 주님입니다.

우린 단지 말씀을 통해서 어떤 자가 주안에서 죽은 복된 자인가를 찾아가고 그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판단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 다니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천국 가는 줄 알지만 천국의 문은 그렇게 허술하지가 않습니다. 교회만 열심히 다녀주면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 안에서 죽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나는 과연 주안에서 살고 있는 자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주안에서 살았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주안에서의 삶이 있기 때문에 주안에서의 죽음이 있는 것이지, 주안에서의 삶이 없었는데 주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도 그것을 언급합니다.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합니다. 즉 행한 일의 결과가 주안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고 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들렸을 때 성령이 그 음성에 대해서 답을 합니다. 그 내용은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입니다. 즉 성령께서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을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살았을 때 수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수고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삶을 마치고 죽는 것을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수고한 것도 없는데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말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주 안에서 수고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의 수고가 없는 자에게는 주 안에서 죽는 죽음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의 수고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흔히 생각하기를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고생을 했다거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것을 가지고 주 안에서의 수고라고 생각하지만, 주 안에서의 수고는 예배당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몸이 고생했다고 해서 주 안에서의 수고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의 수고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앞에 있는 말씀 12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4:12)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의 수고가 무엇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도의 인내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짐승이 등장을 하는데, 강한 권력과 권세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이러한 짐승을 세상이 경배하고 따릅니다. 그 이유가 짐승에게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란 인생의 끝에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에 있어서는 매우 필요하고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끝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세상으로서는 힘 있는 존재로 등장한 짐승에 대해서 경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된 세상의 속성입니다. '힘 있는 자는 살고 힘없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세상의 흐름이며 기본 정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1310절에서는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10)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속성과는 전혀 반대된 말입니다. 사로잡는 자, 칼로 죽이는 자는 힘 있는 자입니다. 세상은 이런 자가 되기 위해서 부지런히 활동합니다.

그런데 그런 힘 있는 자들의 끝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세상 끝날에도 그 힘을 가지고 권력을 유지하며 떵떵거리며 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 되심을 거부하고 세상 것으로 힘 삼아 살던 그들에게 세상의 끝은 사로잡는 자로 살던 그가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또 칼로 죽이던 그가 칼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즉 힘으로 살았던 사람은 그 힘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잡혀가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서 종의 귀를 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겠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칼을 쓴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 망하는 자와 흥하는 자가 어떤 식으로 구별되는가를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반대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종말이고 마지막인 것입니다. 세상 누구나 추구하고 염원하는 힘이 결국 마지막 때에는 나를 망하는 길로 붙들어 갈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비밀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짐승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계시록 149절에서 말씀하는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자로 세움 받은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힘이라고 여기는 것을 힘으로 삼아 그것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수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필히 신자로 하여금 고난에 참여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의 삶에 고난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믿음이 있는 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인내는 현재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 끝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끝을 알고 끝을 보며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의 영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그리스도로 인한 영광을 더욱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 된 자들만이 알고 기뻐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라면 교회에서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아닌 것입니다.

세상과 신자가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신자는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더불어서 서로 어깨를 같이 하고 살아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신자가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서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고 앞장서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도우라고 신자를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세상의 악함을 증거 하는 존재로 세움을 입었을 뿐입니다. 즉 세상의 심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서 세상이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곧 망함이기 때문에 결국 신자는 믿음으로서 세상이 망할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고하는 삶인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세상을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살기 좋은 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가 앞장서고 신자들이 먼저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는 땅을 인간은 끝까지 붙들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는 현재의 영광을 더 추구하는 교회이며, 끝을 바라보고 살기보다는 현재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말씀의 능력 안에 있던 인간은 흙이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흙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흙이 아닌 생명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떠나면 생명에서 끊어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3. 복 있는 신자

이 원칙 아래서 죄인된 모든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끝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극복하고 등장한 것이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될 수 있었던 근거가 어린양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 이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의 근거도 오직 어린양일 뿐입니다.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과 단절된 인간이 말씀의 능력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고, 말씀의 능력 안에 거한다면 그는 흙이 아니라 생명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흙을 생명 되게 하신 말씀의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1-4)고 말씀합니다.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과실은 가지 스스로 맺을 수 없습니다. 과실이 맺어지는 능력은 포도나무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포도나무를 의지하고 살아가겠습니까?

가지인 자신에게는 과실을 맺을 능력이 없음을 깨닫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과실을 맺지 않으면 제거해 버리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하나님에게 제거함을 받는 것이 곧 망함이고 실패임을 안다면 그런데 자신에게는 과실을 맺을 능력이 없음을 안다면 능력이 있는 포도나무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것을 나약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세상이 존경하고 높이는 것은 스스로 과실을 맺는 것입니다. 안된다고 한 것을 되게 한 것, 이것을 세상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말하는 믿음이란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지 자기의 능력 없음을 알고 능력 있는 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주안에 사는 자입니까? 그것은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거절당하신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라면 나 또한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배척받는다고 해도 주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음을 굳게 하는 자입니다. 아담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인간이 되었는가를 알기 때문에 다시는 그 실패의 길을 가지 않기 위해서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주인에 사는 것이고 이러한 삶이 곧 수고하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안식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사는 신자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복이 있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하지만 주 안에서 산 대가로 죽음 후에 천국 가는 복을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란 이미 주 안에서 살고 죽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말씀의 능력 안에 사는 자가 된 것 자체가 이미 충족된 복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복입니다. 끝을 안다면 인생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끝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인생을 의지하고 현재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상관없이 살고 죽는 실패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입니까? 과연 주 안에서 산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까? 말씀이신 주님 안에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알고 주님만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십니까? 비록 세상으로부터 거절을 받는 사고방식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만 의지하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고하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수고를 그치고 쉬는 안식의 시작일 뿐입니다.

수고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 고생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수고하는 삶입니다. 이들이 주 안에서 살다가 주 안에서 죽는 복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사는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한다고 합니까?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타락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 결과로 당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인간을 향한 뱀(사탄)의 유혹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첫 사람 아담처럼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은 무엇이며 또 그 욕망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5. 사람들이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오늘 말씀처럼 주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하며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7. 세상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계시록 1310절의 말씀처럼 사로잡는 자칼로 죽이는 자로 살기 원하는 세상의 힘의 사고방식으로 살던 자들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합니까?

 

9. 성도는 세상에서 어떤 자로 살며 그런 성도의 수고와 고난과 인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에서 주 안에서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는 세상이 추구하는 믿음과 주안에서의 믿음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12. 주 안에서의 복이란 무엇이며 또 반대로 실패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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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 2024 2월 18일 / 요한계시록 48. (계 14:8) 큰 성 바벨론의 운명 관리자 2024.02.18 43
714 2024 2월 11일 / 요한계시록 47. (계 14:6-7) 이세대에 중요한 것 관리자 2024.02.12 43
713 2024 2월 4일 / 요한복음 30. (요 6:3-15) 오병이어의 표적 관리자 2024.02.04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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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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