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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다를 걸으신 예수

본문 / 6:16-21

 

1. 믿음이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이 사실임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과학이나 상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상식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이 사실임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세상에 오셨음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를 예로 들어본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계시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천지창조를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을 믿어주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관계를 분명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의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며 따라서 창조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피조물다움임을 천지창조를 통해서 깨닫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도 예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이적의 사건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과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이적들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가 아니라 이 사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쳐주는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만으로는 계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것만으로 계시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병이어 사건 자체가 복음이 아니며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것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오병이어라는 사건 자체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을 역사적인 실제 사건으로 믿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에서 이적의 사건만을 볼 것이 아니라 이적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들 하나하나는 계시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고 사건에서 예수님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이적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즉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사건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바다를 걸으신 사건에서 어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다를 걸으신 사건에서 풍랑 때문에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즉 세상의 풍랑에서 두려워하는 신자들에게 다가오셔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이나 상식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6:20)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으로 인해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의 내용을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구원해 주는 예수님으로 생각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 본문의 내용에 대한 해석은 모든 복음서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어떠한 해석이든 예수님을 드러내면 된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굳이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다른 복음서에서도 말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그 의도 역시 무시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그 내용들이 서로 동일한 것이 많습니다. 같은 사건을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같기 때문에 해석이 같아야 한다면 결국 복음서가 각기 독립되어 계시되고 있는 이유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서를 통합해서 하나의 복음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본문의 사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2. 요한의 의도

먼저 본문을 살피기 전에 다른 복음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본문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비교를 해 보면 마태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육지에 계시다가 풍랑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파도로 인해서 제자들이 두려워하더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자를 보고 두려워했던 것이고,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았을 때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볼 때 요한복음에서는 풍랑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6:21)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태와 마가복음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14:33-34)고 합니다. 마가복음 6장에도 보면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6:52-53)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세 복음서를 서로 비교를 해 보면 한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른 시각에서 예수님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바다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고, 마가는 풍랑 속에서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통해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오늘 본문의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예수님과 함께 한 배가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임금만 된다면 자신들의 먹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피하신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떡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떡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이적의 사건을 본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에게서 떡을 보고 있습니다. 떡을 위해서,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피하신 것이 곧 나는 너희가 원하는 그런 일을 위해서 온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떡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데 왜 예수님은 옛날처럼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을 먹이셨는데 왜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이적이라는 사건 자체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적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이적이라는 신기한 사건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적이 또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도 이스라엘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다면 만나라는 이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만나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3)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만나를 먹으면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병이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베푸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만나나 오병이어 모두가 사람을 배 불리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옛날과 같은 이적을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하나님은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일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이적도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역시 육신의 문제와 연관 지어서 이적을 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무너지고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좇아서 예수님이 가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의미있는 것으로 존재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도 목적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은 풍랑과 파도가 있는 곳인데 그 모든 것은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신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가려던 곳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위기에 빠진 제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기쁨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이 함께 한 그 배가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신자가 바라는 나라

오늘 본문 25절부터 보면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5-26)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아오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그 배부름이 좋아서 예수님을 좇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육신의 배부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함께 하심은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이지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까 우리들의 일이 잘되고 육신의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가 가려는 곳은 신자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선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처럼 천국에 대해서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나약함을 안다면 천국에 대해서 자신의 힘을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의지한다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안다면 그리고 진심으로 마음에 천국을 두고 사는 신자라면 분명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되어지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 사실을 알기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을 두고 사느냐 아니면 세상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세상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오병이어를 보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배부름을 얻을 기대를 가집니다. 그러나 천국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갈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떡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떡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예수님에게서도 떡을 보게 되고 떡을 기대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보고 사는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천국임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생명이 되는 떡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달리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으로 만족하고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 육신이 배불러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소망이 그리스도로 배부름을 얻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은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 노를 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배에 오르시자 그 배는 파도와 상관없이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배에 주님이 오르심으로써 파도와 상관없는 배가 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 세상의 파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신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주님으로 인하여 가려던 곳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신자는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일이 잘돼도 기쁘고 안돼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망해도 기쁘고 아픔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파도가 치는 것과 상관없이 흔들릴 수 없는 반석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풍족해지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배부름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것으로는 주려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강함이고 위대함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십시오. 그 나라가 무엇으로 들어가는 나라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진심으로 그 나라를 원하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천국이 진심으로 우리가 원하는 나라라면 우리의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에 감사하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소망하는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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