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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 나라의 추수

본문 / 14:14-16

 

1. 신자란

우리가 어릴 적에 많이 읽는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거나 아니면 어릴 적에는 변변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큰일을 했다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을 하고 성공을 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위인전 책을 사주는 이유도 너도 이런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책에 등장하는 위인들처럼 어려움을 겪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위인들처럼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극복하는 불굴의 의지로서 성공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일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위인전에 끼일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은 예수님을 4대 성인이라 하면서 존경을 한다고 하고 또 위대한 분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차원 높은 선한 사람이었다는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뿐이지 예수님의 삶 자체를 본받자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은 비참한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이라고 말하면서 성인이니 뭐니 높인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삶을 본받을 마음은 추호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라는 착한 사람을 칭찬해주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는 식인 것입니다. 어느 누가 과연 예수님을 본받아 살라고 가르치겠습니까? 설사 예수님을 본받을 것을 가르친다고 해도 남을 도와주는 것이나, 착하게 살아가는 정도의 본받음을 말하는 것이지 예수님처럼 죽기 위해서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까?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신 삶에 대해서 마음이 쏠리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말할 때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은 십자가에 같이 죽자는 초청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이란 온통 생존에 쏠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생명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생존을 더 급박한 문제로 취급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십자가에 같이 죽자는 초청에 순순히 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인 치시고 생존에 대한 욕구가 곧 탐심이며 죄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케 하시며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오직 생명을 추구하는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생명과 생존을 동시에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데도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생명만이 존재할 뿐 생존을 같이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생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환상을 부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환상이 부서진 자리에는 오직 현실만이 남을 뿐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오직 종말을 외칠 뿐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남은 하나님의 일은 심판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동안 참으셨던 일에 대해서 말씀대로 행하시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는 종말 외에는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세상의 위기를 나타내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 안에서 위기를 찾지를 못합니다. 끊임없이 생존에 대한 자기 환상을 찾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존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그 환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붙들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자신의 생존에 뛰어들어서 함께 해주고 위태롭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마음은 콩밭에 가 있기 때문에 성경 안에서 위기감을 느끼지도 못할뿐더러 세상의 참된 현실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세상의 현실이 무엇이며 또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성경이 결코 우리의 생존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남겨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닫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는가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찾은 바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세상을 사는데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세상의 소유를 많게 한다거나 일을 더 잘되게 한다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구에서 만들어진 우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특권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6)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땅에서 뭔가 얻을 것에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 앉은 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은 위인들처럼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성공인 것입니다. 이 성공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지금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2. 어리석음

오늘 본문의 말씀도 우리에게 급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 익은 곡식을 거둔다는 것, 즉 추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익은 곡식을 추수한다는 것은 급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추수라는 말씀 앞에서도 느긋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 이유는 추수라는 것을 아직까지 먼 시간이 남아 있는 먼 일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추수의 문제는 뒤로 보류해 버리고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생각되는 생존의 문제에 몰두 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생명과 생존의 문제 둘 중에 어느 것도 더 급한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답을 하겠습니까? 물론 정답은 생명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삶은 무엇에 정답을 두고 있습니까? 생명은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생존은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도 내일도 믿을 수가 있지만, 돈은 지금 내 것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는 생각이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돈을 벌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물론 돈이라는 것은 지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일도 벌 수 있는 것이 돈이지만 오늘 벌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 당장 내 손에서 벗어나는 돈에 대한 아까움 때문에 생명에 대한 문제를 보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해서는 내일이라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과연 생명이라는 것이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이렇게 우리 마음대로 붙들고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까? 생명은 인간의 범죄 이후로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시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생명이 있는 쪽에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붙들고 데려가지 않으면 인간은 끝까지 생명이 없는 존재로 끝나버릴 운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기 백성들만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성령으로 인치시고, 죄가 무엇인가를 책망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생명에 대해서 감사하며 기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것이 세상인데, 과연 그것을 알면서도 생명에 대한 문제는 급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는 문제는 내일이라도 할 수 있지만, 돈은 지금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까? 믿음은 성령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을 안다면 날마다 성령께 자신의 믿음을 부탁하는 기도를 게을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으로 인침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인은 생존의 문제보다 생명의 문제를 더 우선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역사적인 시각에서 시간의 순서로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심판에 대해서 느긋한 마음을 가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시간의 순서로 인식을 함으로써 아직 멀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역사적 시간의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묵시적 시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시간적으로 사건들을 차례차례 나열한 것이 아니라, 한 통 안에서 한꺼번에 뭉쳐있는 사건으로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익은 곡식을 거둔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미래에 해당 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익은 곡식을 거두는 것이 미래의 사건이라면 현재의 곡식은 아직 익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에 추수가 보류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뜻으로 이해하는 것을 성경은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3. 주님의 추수

오늘 본문을 보면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14:14)고 말씀합니다. 계시록 14장의 14절부터는 두 종류의 추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백성을 거두는 추수이고, 17절 이후부터는 심판을 위한 추수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름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 구름으로 나타나셨고, 하나님이 여호와의 산으로 모세를 부르실 때는 구름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34:5)라고 말씀을 합니다. 즉 구름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흰 구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볼 수 있고, 그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앉았다고 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 면류관을 쓰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왕으로서 날카롭고 예리한 낫을 가지고 익은 곡식을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익은 곡식을 추수하신다는 이 사건을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지금은 곡식이 익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골로새서 1장의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1:28)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추수의 대상인 성도가 점차 익어간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웁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완전케 된 자이지 점차 완전해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으로 완전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이 도저히 완전한 자의 삶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전해져 가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더 신뢰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완전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해도 절대로 완전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익은 곡식을 추수하는 날은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예수님이 신자의 성숙을 원하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완전이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완전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완전케 됨을 얻는 것이지 신자 자체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4:26-29)고 말씀합니다.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댄다는 구절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씨는 농부의 노력에 의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씨가 싹이 나서 이삭이 되고 열매를 맺고 익는 모든 것은 땅에 의해서 스스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도움을 받아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인해서 완성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이 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대어서 추수를 하는 것처럼 이제 천국에 남은 것은 추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추수를 기다리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천국이 완성이 안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추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완성된 열매이기 때문에 남은 것은 오직 추수이고 신자는 그때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추수란 절대로 멀리 있는 일이 아니며 바로 지금 현재의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 다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는 신자라면 오직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은 익은 곡식을 거두는 추수일 뿐입니다. 미완성된 시기라면 완성의 때를 기다리는 간격이 있지만 완성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추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완성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추수는 바로 지금의 일로 여겨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9:37-38)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추수하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고 추수를 위해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이것은 구원받을 영혼은 많은데 그들에게 전도할 사람은 적으니 전도할 사람을 많이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즉 오늘날의 전도나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추수할 일꾼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면 제자들은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옳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보내신 것은 제자들이 곧 추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쓰여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추수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할 일꾼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일꾼을 부르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추수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4:16)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앞으로 되어질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어진 일로 언급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를 긴장되게 하는 것은 이미 추수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회개하면 되고 나중에 믿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주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추수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안다면 주님이 살아가신 그 길에서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맺어진 열매이고 거두어진 익은 곡식이라면 자신에게서 주님의 은혜만 드러나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라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지 내일 잘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은 내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무시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로 인해서 모든 것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익은 곡식을 거두는 것밖에 없습니다. 주님에 의해서 익은 곡식을 거두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맺어진 열매는 항상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바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삶을 돌아보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나중에라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물을 뿐입니다.

내일 잘하면 된다가 아니라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주님의 열매로 존재하느냐를 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이러한 삶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가 바로 익은 곡식이고 예수님이 추수한 열매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직 생존에 문제에 붙들려 사는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세상의 심판을 말하는 성경을 보면서도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세상 시각에서의 성공과 하나님의 시각에서의 성공은 어떻게 다릅니까?

 

4. 우리가 생명의 문제와 생존의 문제 중에 생존을 더 마음에 두고 사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우리가 하늘나라의 추수 문제를 긴박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오늘 본문 14절의 말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왕으로서 익은 곡식을 거둔다는 것을 미래적 사건으로만 본다면 어떤 오해가 벌어진다고 합니까?

 

7. 예수님이 신자의 성숙을 원하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에서 신자의 성숙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9.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자란 어떤 존재라고 말씀합니까?

 

10.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라는 주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1. 오늘 말씀에서 추수는 언제 되어지는 것이며 또 그것을 바르게 안다면 나중에 회개하고 나중에 믿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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