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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일과 믿음

본문 / 6:28-31

 

1. 생명과 생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라는 사람이 그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임금 삼아서 자신들 스스로 예수라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기를 원할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고 예수님을 필요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그들의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하신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 하반절)는 말씀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오병이어의 이적에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표적을 봤더라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동기가 달랐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병이어 이적에서 배를 부르게 하는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살리는 참된 생명의 떡을 봤더라면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지는 않았을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한 필요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곧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임을 27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보면 생존이냐 생명이냐에 의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찾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확고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을 찾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곤란한 부담과 갈등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존과 생명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존에 대한 문제를 초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 생존에 매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데 생명을 위해서 생존을 포기하라는 것은 엄청난 갈등의 요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성경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과 사단이 어떠한 문제로 대립되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생존의 문제를 제시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생명의 문제로 반격합니다. 떡에 대한 문제에는 오직 말씀으로 산다는 것으로, 기적에 대한 문제에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것으로, 세상 만국의 영광에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라는 것으로 대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을 포기하라는 것은 살기를 포기하라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생존을 포기하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이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님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오신 분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 앞에 생명을 원하는 자로 서게 되는 것이지 생존을 원하는 자로 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존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계십니다. 공중을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고 오직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존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곧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무리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먹을 것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에 나가고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일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노동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는 것 자체를 일로 표현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것에 대한 잘못됨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는 말씀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존재하고 있으니 그 일을 찾아서 하라는 의미의 말씀이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은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분임을 알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일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들의 몸으로 활동하고 수고하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을 찾는 것 자체를 두고 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일하긴 일하되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을 세상일로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일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구분을 교회의 일과 세상에서의 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세상일 때문에 교회 일에 대해서 게을러지는 것을 가지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강조하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일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자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6:28)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질문 내용을 보면 일하라는 말씀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역시 일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영생을 위한 일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요즘 교인들이 교회의 일을 무턱대고 하나님의 일로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6:28)라고 질문을 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자기들의 노력, 즉 일에 대한 보상과 대가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만 가르쳐 준다면 우리가 그 일을 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행동을 자신들이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생을 소유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 영생은 자신들의 일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의 생각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익숙해진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노력에 대한 보상과 대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잘한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것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 역시 받을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닫아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스스로 상상하고 만들어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에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이든 구원이든 내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6:28)라는 질문은 당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의 무지한 질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무지한 모든 사람에게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할 일로 이해하고 있다면 본문과 같은 질문의 잘못됨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기들이 실천해야 할 어떤 일에 대한 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가령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 하라든가? 교회에서 어떻게 하라든가?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신들이 실천해야 할 것으로 이해한다면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이라는 개념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의 말씀으로 이해를 해 본다면 결국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는 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믿음이 이처럼 가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생존 문제에 매어서 생명 문제를 등한시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역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생명의 문제와 연관될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의 소관도 우리의 실천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인한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3. 믿음

그런데 질문을 한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실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6:30)라는 질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예수님이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1:22)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증거로서의 표적을 구하는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요구를 볼 수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이들의 요구는 요한복음 2장에서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2:18)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고 또한 요한복음 4장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48)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유대인들의 무지한 요구로만 볼 수 있겠습니까? 표적, 즉 믿기 이전에 믿을 수 있도록 뭔가 보여주기를 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뭔가를 보여주면 더 확실히 믿을 수 있겠다는 바람은 우리들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믿는다고 하는 막연함보다는 실제로 직접 보고 확인한 상태라면 더욱 확실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을 인간의 소관으로 여기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보고 또는 보지 않고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뭔가를 보고 확인함으로서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선택해서 믿음으로 믿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6:31)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옛날 자기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 같은 표적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믿을만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불신앙인 것입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을 근거로 해서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눈에 보여지는 행함이나 실천이 없을 때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은 믿음을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에게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여주면 내 발로, 내 스스로 예수님에게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자기 신뢰를 버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고 체험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수없이 목격하고 체험했던 이스라엘은 왜 믿음에 실패했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옛날 조상들이 만나를 먹었음을 언급한 그들은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결국 원망하고 불평하는 길로 나아갔음을 생각하지 않는 무지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믿음이 나에게 주어지면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가 일하는 것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곧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붙드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붙들어서 하나님에게로 이끄심으로 되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하심으로서 믿음이 있게 되어짐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표적을 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39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믿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일하신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믿음으로 인한 흔적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하시는 결과로 보여지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믿음이 주어지면 그 믿음이 나를 다스림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나 속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믿음의 흔적이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일하심을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일함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이 영생을 믿게 되는 것이고 설사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행함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행함을 신뢰하는 가운데 영생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믿음이고, 이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되어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인간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문제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믿음은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우리의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것입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까? 믿음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면 믿음을 자랑거리로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됩니다. 행동을 비교하면서 타인의 믿음을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을 내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자신의 실천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구원은 분명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일한 결과와 보상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넌 왜 나처럼 하지 않느냐?’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린 단지 믿음을 담은 그릇으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증거하는 도구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함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행함에서 믿음의 여부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믿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으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썩는 양식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고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도 끊임없이 썩는 양식만을 원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능력이 우리를 다스리고 썩는 양식을 구하고 세상에 이끌리는 마음을 붙들어서 놓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보고 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영생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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