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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이 섞인 유리 바다

본문 / 15: 1- 4

 

1. 신자의 기도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먼저'라고 말씀하는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그 다음에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순서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응답받는 기도 비결이라고 하면서 먼저 천국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다음에 회개를 하고, 다음에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고, 다음에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식으로 기도의 순서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도에는 순서적인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기도의 순서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니까 응답이 안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 순서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말합니다. 결국 그러한 것은 하나님에게 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 대가로 그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준다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복음은 사람에게 새로운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즉 돈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한다는 확실한 주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라면 그는 돈의 문제는 초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 속에는 이미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대한 문제는 해결된 상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복음의 사람이라면 이미 그런 것을 초월하는 삶을 사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진정한 가치를 아는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 가운데 답하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는 말씀처럼 이미 삶의 힘이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있기 때문에 떡에 대한 문제는 초월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자에게는 결국 떡에 대한 것은 구할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누리는 차원인 것입니다.

떡이란 사람이 자기 생존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은 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주시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다음 순서에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구하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구하며 살아갈 것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을 구하며 살아갑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에 필요 가치가 있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관심이 있는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땅의 것에 관심을 가지고 땅의 것을 위해서 구하며 살아간다고 할 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삶에 있어서 관심 자체가 달라질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관심이 자기 생존 다시 말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두고 산다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 공중의 새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부자로 사는 것도 가난하게 사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존 문제로부터 초월하는 것입니다. 초월은 관심사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땅의 생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하늘의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달라지는 것이 곧 모든 것을 얻은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얻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채워진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평안인 것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살아가게 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할 때입니다. 즉 세상의 실체와 그 운명을 바르게 발견할 때 바른 가치 판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는 것도 상대적으로 땅은 소망을 둘만 한 가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육신은 세상 안에 있지만 그 마음은 세상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한 부분만을 보면서 그것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면서 세상이 어떤 운명 속에 있는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2. 어린 양의 노래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15:1)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죄가 폭로된 이상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 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요한계시록을 보면 8장부터 11장까지의 일곱 나팔을 통해서 세상의 죄악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은 악이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를 낳은 여자가 등장할 때 여자가 낳은 남자를 죽이기 위한 세력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실패했을 때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을 합니다.

그러나 여자가 보호를 받음으로 여자를 핍박하려는 용이 분노하게 되고 결국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악이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남은 자가 등장함으로 인해서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악의 세력이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드러난 악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로 그 정체가 드러난 역사적인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시록 19장까지 말씀하고 있는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신자가 이 현실을 보고 산다면 세상에 대한 가치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망하기로 작정된 회사에 투자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투자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혹시나'라는 요행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악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요행을 버리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 자체가 절대로 변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본문 2절부터 보면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15:2-3 )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 부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우리는 구약의 한 사건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되어서 홍해를 건넌 후에 애굽 군사들이 바다에서 죽는 광경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불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란 하나님의 심판이 함께 섞인 바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리 바다에는 불과 물이 함께 있습니다. 불이 심판을 의미한다면 물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유리 바다 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죽음과 심판을 건너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홍해에는 이스라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굽 군사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건넌 후에 애굽 군사가 바다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에 들어온 후에 애굽 군사가 쫓아 홍해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건넌 후에 바다가 닫혔습니다.

홍해에 이스라엘과 애굽이 함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시 애굽과 같이 멸망 받을 대상으로 취급을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멸망에서 구출되었고, 애굽 군사는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구출 받은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어린양의 피입니다. 피가 근거가 되어서 멸망 속에서 이스라엘이 구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홍해 바닷가에 서서 애굽 군사들의 멸망을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뭔가 경험이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서 구출된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록 59절에서는 '새노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과 죽음에서 구출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계시록 59절에서 말하는 새노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노래하는 것이고, 이것을 오늘 본문 3절에서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노래란 애굽에서 구출되고 홍해를 건너서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노래 역시 새로운 삶의 시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서 노래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아는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고,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서 건짐받은 경험이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자신들 역시 홍해에서 애굽 군사들과 함께 있었는데 자신들은 구출되고 애굽 군사는 바닷물에 의해서 수장되는 장면을 보면서 그것을 우연이라고 아니면 자신들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자신들도 애굽 군사와 마찬가지로 홍해에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노래는 홍해를 건너기 전에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서 배우게 된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 역시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을 경험했을 때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심판 속에서 구출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구원의 근거가 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지 추상이 아니라 실제이며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즉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속에 있고, 신자는 그 바다를 건너서 바닷가에서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재적인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심판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심판을 볼 때 자신이 그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출하신 그리스도의 피에 감사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홍해 속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가치가 없습니다. 결국 물에 수장되고 말 것인데 돈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출세와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죽음 뿐인 것입니다. 세상이 현실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구원받은 신자의 눈에 이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안에 있는 것으로 보여질 때, 세상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가치와 성공 출세를 위해서 수고하고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들이 참으로 허무한 것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로 산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심판받을 운명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심판 속에서 구출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알았기 때문에 주님을 노래하면서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노래는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노래를 부를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가 어린양의 피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심판받을 세상에서 구출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등장한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노래를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노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자들만의 노래입니다. 그들만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배우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바로 새노래인 것입니다.

 

3. 심판 때에 알게 되는 것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15:4)고 노래합니다. 여기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라는 말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없고, 영화롭게 하지 않을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의 사회가 주의 이름에 대해서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 교회는 어떻습니까? 진심으로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주를 영화롭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는 교회를 부흥시킴으로서 주를 영화롭게 하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현실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도 영화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4절의 말씀은 무슨 의미인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될 때 모든 자들이 주의 이름의 두려움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존에 있어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던 주의 이름이고 십자가입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심으로서 우리가 바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야 할 존재임을 가르쳐주는 것이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가 오늘날은 사람들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 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의 이름이, 십자가가 바로 생명을 얻음에 있어서 유일한 근거였음을 심판 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버렸던 것이 심판이 시행될 때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망하는 심판 속에서 나를 붙들어서 생명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자들이 심판 때에 주의 이름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심판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주의 이름이나 십자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이런 현실에서 신자의 다른 점은 심판을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받을 장소임을 보고 살기 때문에 심판에서 구출 받은 자신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서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 2절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을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바다에서 또 땅에서 권세를 가진 짐승이 등장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 짐승에게 경배를 하게 합니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합니다. 짐승은 권세자입니다. 권세로서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입니다. 세상은 그에게 경배합니다. 권세를 경배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세상을 힘으로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힘이 생명이 아니며, 권세가 생명이 아님을 알기에 경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심판을 보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의 가치를 세상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으로 여깁니다. 결국 심판의 세상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유일한 길 되신 피 흘리신 그리스도는 무시되고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버리게 됩니다.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는 유리 바닷가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심판과 죽음의 바다를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죽는 것이 두렵지가 않은 사람들입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성공이 부럽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손수 가져오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운명과 그 실체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노래하려고 하지 마시고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더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의 먼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신자는 어떤 자이고 또 신자는 어떤 삶을 사는 자이며 그런 신자가 그리스도의 평안은 어떻게 누리게 된다고 합니?

 

 

4. 세상에 대한 심판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 것입니까?

 

5. 출애굽 후 홍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 오늘날 그 말씀을 대하며 우리 또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6.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그리고 우리가 부를 수밖에 없는 새노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7. 오늘 말씀처럼 신자가 바닷가에서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라고 한다면 그런 신자의 눈에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8.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라고 합니까?

 

9.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그런 십자가를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본문 말씀처럼 주의 이름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1. 세상을 이긴자, 세상을 벗어난 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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