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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걸림이 되는 말씀

본문 / 6:52-63

 

1. 주를 찾는 목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문제를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것으로 다 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께 나오고 있고 또 예수님을 부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한다라고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그들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6장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이적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적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시고 유대인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결국 가버나움이라는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대단한 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라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 너희는 떡을 위해, 즉 너희의 배부름만을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지 생명과 진리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단지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으로 그 신앙을 옳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찾느냐를 보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책망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자신의 배부름을 위한 떡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배부름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찾고 구할 것은 생명이지 결코 배부름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분명하게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떡이라고 하는 자기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은 33절에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6:33)고 말씀하셨고 또한 51절에서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6: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생명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에 우리의 배부름을 위한 떡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결코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물론 35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는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도 육신의 배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고 채워 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음을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필요를 얻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잘못 찾은 것이며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것은 무엇입니까?

 

2. 인자의 살을 먹고 마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자기 살이며 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3-55)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예수님이 줄 떡은 곧 자기 살이며 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60절에 보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60)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6)는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들의 이러한 반응을 보면서 아마 우리는 어렵다고 하며 예수님을 떠나버린 그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어렵지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과연 어렵지가 않습니까?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볼 때 우리만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려워하기보다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 오늘 본문의 무리처럼 어려워서 못 듣겠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아멘을 너무나 쉽게 외치면서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과연 우리가 그들보다 신앙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들보다 머리가 좋아서이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렵다고 한 것은 말씀에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의미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사용된 단어나 문장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가령 예수님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 이 말씀에서 어려운 단어나 문장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셔라 그리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6:52)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그 의미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기 살을 누군가에게 먹게 하고 피를 마시게 해서 그를 살린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말이 안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그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이들은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떡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생명의 문제는 율법에 있었고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생명에 거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생명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까? 우리에게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어렵지가 않다면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그 말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면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의미를 이해한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것을 믿는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까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믿지 않을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는 것은 지식의 차원에서 머리에 담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믿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 바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자의 살은 세상의 죄인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를 위한 섬김을 의미합니다. 몸으로서 죄인된 우리를 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의 피는 사망에 처한 우리를 생명으로 건지기 위해서 흘리신 희생을 의미합니다. 몸은 섬김이요 피는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내 속에 그리스도가 함께 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가 섬기신 섬김과 희생하신 그 희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십자가를 믿는 것이고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은 이해하지 못해도 믿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말씀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쨌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희생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을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해하지 못하고 믿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알지도 못하면서도 믿는다고 외치는 우스운 현상들이 오늘날의 교회에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알지 못하기에 엉뚱한 것을 붙들고 예수님에게 나오게 됩니다.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은 책망하실 수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알려고 하지 않고 단지 믿고 있다는 자기 생각에 만족해 버리기 때문에 말씀으로 인한 갈등과 고민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충돌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사고방식과 어울릴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이해될 때 그 말씀은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책망하고 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등과 고민이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떡이라는 자기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을 임금 삼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알았다면 자신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오직 생명과 진리를 찾을 뿐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떡을 구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아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았던 유대인들과 똑같이 예수님에게서 떡, 즉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구한다면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의 수준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씀을 듣고 있고, 들으면서도 말씀이 어렵지가 않다면 그것은 말씀을 알려고는 하지 않고 단지 믿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교회에서 정직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복음, 정직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유일하게 교회인데 그런 교회가 성경에서 멀어진 복음을 말하기 때문에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멀어진 다른 복음은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본래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지혜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데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복음이라고 외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복음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러니 누가 말씀이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나가겠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 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3. 하늘 떡

오늘 본문 57절부터 보면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7-58)고 합니다. 이 말씀 역시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냈다고 말씀을 하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모와 형제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을 알고 마리아를 압니다. 그리고 자신들 앞에서 하늘로서 왔다고 말하는 예수가 바로 그들의 아들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온 떡이라고 말합니다.

하늘로서 왔다는 말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이해가 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늘은 아마 공중이라는 의미의 하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공중에서 왔다는 의미로 하늘로서 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명 거짓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공중에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비록 잉태는 성령으로 되어진 것이지만 태어나신 것은 여느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공중에서 왔다고 하신다면 인간의 몸에서 나신 것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로서 왔다는 말씀은 공중이란 뜻으로서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도 하늘을 공중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42절에 보면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6:42)라 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려워한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에 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63절에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말씀을 어려워하고 예수님을 떠나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이 육에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61절에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61 )라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걸림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어렵게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은 영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정작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육에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늘이란 곧 생명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공중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땅, 즉 멸망의 나라인 세상과 다른 생명의 나라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늘로서 왔다고 하시는 것은 죄로 인해 사망에 처한 세상에 생명의 나라에서 생명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결코 예수님의 육적인 몸이 온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인간의 부귀와 생활을 책임지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지 우리의 배부름과 떡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에게서 구할 것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육과 상관없는 영에 관한 일입니다. 영에 관한 일이란 육에 매어 있는 동시에 영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에 관심을 가진다면 자연히 육에 대해서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살리는 영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오는 신자라면 예수님에게서 육의 문제를 구하지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의미입니다.

 

4. 영에 속한 사람

그런데 이러한 영의 말씀이 어려운 자가 누구겠습니까? 이러한 하늘의 말씀이 걸림이 되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육에 매이고 땅에 매인 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육의 문제를 구하는 자,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깨달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머나먼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에 어울리고 이해되는 말씀을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비록 교회 나가니까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고 걸림이 되어서 말씀을 떠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떠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니지만 정작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신자 아닌 신자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걸림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 본래의 사고방식으로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로 말씀을 보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신자는 예수님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고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육의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그럴 때 단지 어렵고 힘들다는 것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의 문제 안에서 영의 문제를 찾으십시오. 분명 길이 있습니다. 육의 문제가 해결되는 길이 아니라 힘든 육의 문제 안에서 새로운 기쁨과 힘과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육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지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애당초 예수님은 우리들의 육의 문제를 도와주거나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지 않았습니다. 육은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오직 영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라면 영의 문제만을 말씀하시고 우리들의 영적인 문제를 위해서 일하실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살리는 떡은 없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 만나를 먹고서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은 유대인들은 떡을 구합니다. 영적인 생명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먹고도 죽은 떡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살고자 하며 또 영원한 생명에 머물고자 하는 자입니까? 이것이 진정한 우리의 마음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오직 생명만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희생과 섬김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그분의 긍휼을 구하면서 의의 나라를 소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능히 감수하는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생명이 있는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어려움이 없고 걸림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놀라운 축복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서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세상에서 대접받고 사는 것에 마음 뺏기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아무리 귀한 대접을 받고 산다 해도 그 세월은 몇십 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영원토록 멸망에 빠진 채 고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비록 힘들게 살고 사람들에게 대접받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 받는 자로 산다 할지라도 잠시 잠깐만 참으면 지나는 세월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간을 잘 버티고 견디며 주를 바라며 살아온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토록 대접받으며 살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 대해서는 부러울 것이 없어야 하고, 없어서 애타는 것이 없어야만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과 피,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놓으셨는데 그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가 정작 세상에 대해 부러워하고 애를 태운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세상 것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면 걸림이 되십니까? 우리가 이러한 주의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 주의 음성에 진정으로 아멘이 되는 자로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런 우리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육과 싸우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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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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