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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

본문 / 2:22-32

 

 

1. 나의 일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죽였고, 하나님이 다시 예수님을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중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 삼천 명이나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설교를 대하면서도 그들처럼의 마음에 찔림도 없고 회개도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았다는 것은, 베드로의 설교 내용인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2:22-23)라는 내용을 자신들이 행한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을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인정하였기에 예수님에 대한 모든 말씀들이 자신들과 상관이 있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정당성을 하나님이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세우신 분을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신들이 죽였음을 생각할 때,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신들의 허물이며 무지임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에 찔림이 있을 수밖에 없고 회개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한 설교의 내용을 전혀 바꾸지 않고 오늘날 그대로 했을 때 과연 그때처럼 삼천 명이 마음에 찔림을 얻고 회개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숫자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설교에 단 한 명이 회개를 했다면 아마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삼천이라는 많은 수가 회개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천이든 한 명이든 중요한 것은 마음에 찔림을 얻고 회개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한명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것이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명이든 삼천 명이든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한 명을 회개시키든 아니면 삼천 명을 회개시키든 그것은 모두가 큰 능력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감각이 생겨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됨으로 인해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회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논리나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결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찔림을 받았다는 것 역시 자신의 허물을 볼 줄 아는 감각이 생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능력이라는 것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가 된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의 설교를 대하면서 회개할 수 있다면 그는 베드로가 설교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바로 자신의 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한 사람들처럼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 깊이 느껴질 때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람의 마음에 찔림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베드로의 설교를 대하면서 마음에 찔림이 없고 회개함 역시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것은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얘기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금 베드로가 당시와 같은 설교를 한다할지라도 그것을 자신과 상관이 없는 얘기로만 듣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단지 설교일 뿐, 그의 마음을 찌르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지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심지어는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3:11)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5:7)라는 말을 보면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으되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보든 설교를 듣든 중요한 것은 이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경도 설교도 결국 우리의 마음에 남지 못하고 듣고 본 것으로 끝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고작 어떻게 해서 예수님께 세상의 복을 받을 것인가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에서 많이 실패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 자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예수님을 죽인 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얘기가 나오면 모두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돌이켜 회개한 삼천 명과 같이 우리는 돌이켜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개한 자가 진정으로 성령이 임한 자이고 그렇기에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믿음으로 봄

그리고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는 그렇게 죽인 예수님은 사망의 고통에 메여 있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풀어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시기 때문에 사망에 메여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 사도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2:25-28)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편 16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29절부터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2:29-31)고 합니다. 다윗은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우리 중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자신의 육체가 희망에 거하며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 시편은 다윗이 선지자로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한 것이라고 베드로는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윗조차도 아직 오시지 않은 주를 뵈웠다고 말하면서 그분이 다윗의 우편에서 다윗이 요동치 아니하도록 붙드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다윗도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기쁘고,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미 맹세하사 그 왕위에 앉게 할 자를 그 자손가운데서 일으키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기에 그리고 그 약속을 믿었기에 믿음으로 미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미리 본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시편이 되는 것입니다. 저가 음부에 버림을 받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에 대한 미리 봄이 아브라함도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입니다. 이삭은 이미 태어날 때도 사라의 죽은 몸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려짐도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는 형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그 육신이 음부 즉 무덤에서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내다 본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만이 아니라 율법의 제사에서도 제물이 썩지 않도록 유월절 화목제물로 드려진 어린 양의 고기가 다 먹지 못하여 남으면 반드시 불로 사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썩음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소망을 인하여 다윗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28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2:28)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2-19)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모든 것도 헛될 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 아래 사망아래 사로 잡혀서 일생동안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이 오시기도 전에 믿음의 사람들은 단지 약속만 받고도 그 약속을 믿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고백과 삶을 살았음을 봅니다.

 

 

3. 우리의 신앙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 믿음의 선진들처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의 사건이 우리의 마음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우리 일에 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는 그저 다 아는 이야기로 들려질 것입니다. 성경 보는 것은 귀찮은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역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저 교회 다닌다는 것으로 신자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예배드리고, 간혹 좋은 일에 헌금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음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신자로 여긴다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죽음인 자신의 존재성, 즉 존재 가치가 없음에도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름을 한번 날려보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여 간다는데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에 대해 참을 수 없어 때로는 엉뚱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망아래 행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가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모두가 썩어지고 쇠하여 지고 더러워지는 것들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돈 없으면 못살지만 신자는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없으면 못산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가에 대해서도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뭔가를 하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다시 살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이며, 이것이 신자의 신앙생활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 문제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으며,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근거도 이유도 없이 교회를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참으로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근거로 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무턱대고 아무 생각 없이 주일이니까 교회를 나오는 것 말고 교회로 모여야 할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사신 길을 따라가야 할 근거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직장 생활을 힘들어 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해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은 하기 싫다고 해도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힘들고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것은, 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현실적으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분명한 현실적인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고 합니다. 이러한 약속을 우리는 이미 받았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라고는 없는 것입니다. 해 아래 모든 것은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여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썩어질 것들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나 부나 존귀가 모두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아직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불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단지 죽어서 부활하고 영생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영으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는 이 세상 다 준다고 하여도 그것이 기쁨이 아니라 주님 한분만으로 기쁨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나누는 예원 가족들에게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분명한 근거로 자리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자가 바로 부활의 증인임을 알아 하루하루를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베드로의 설교가 상식적인 수준의 내용임에도 찔림과 회개가 일어난 까닭은 무엇입니까?

2. 회개한다는 의미와 또 말씀에 찔림을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에서 많이 실패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윗이 마음이 기쁘고, 혀도 즐겁고, 육체도 희망 가운데 거 할 수 있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6.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성이 회손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를 신앙하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며, 믿음을 가진 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한다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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