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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일 = 자아가 죽는 일

본문 / 요18: 1- 5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묘사들이 처절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럽고 밝을 정도의 승리의 색깔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죽기 얼마 전에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21장에 실의에 빠져 물고기 잡으러 되돌아가는 제자들의 부끄러운 모습과 실패한 경험만 가지고 요한복음을 쓴 것이 아니라 이미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어 승리의 기적들과 놀라운 감격들을 체험한 후에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서 철저히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되새기며 십자가로 죽은 옛사람 위에 새사람이 살아 절대 주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바뀌게 된 것이 사도 요한의 놀라운 점입니다. 그리고 이 같이 놀랍게 변화된 요한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 요한의 뜻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외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기적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한 번의 설교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회개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담대하게 만들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놀라운 기적과 영광과 승리를 맛본 요한이 왜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에서는 실의에 가득 찬 모습을 기록하여 결론으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피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먼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9:51-56)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사마리아 땅을 지나려 하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합니다. 그러자 요한이 말하기를 ‘주여, 제가 하늘을 명하여 불을 내려 저들을 사르라고 할까요?'합니다. 우리는 요한하면 사랑의 사도로 알고 있기에 상당히 온유하고 감성이 부드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성경은 뜻밖의 표현으로 되어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열두 제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3:17) 그러니까 요한의 별명이 우뢰의 아들이었는데 후에는 사랑의 사도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에는 혈기의 사람이었는데 그 후에는 변화되어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같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은 자신을 통해 인간이 자연인 그대로의 모습일 때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모습이 어떻게 다른 가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치신 교훈에 대한 영적인 내용들을 추적해 오면서 결국 결론에 가서는 인간이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주님의 영적인 가르침을 알아듣고 실천할 만한 능력이 없는 존재이며,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도 그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이야기 속에서는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도 옛날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요한의 표현처럼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제대로 알아야하고 또 더 나아가 거기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만일 자신의 참모습과 변화되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뜻밖에도 우리들은 신자 아닌 신자의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요한복음이 지적하는 이야기의 내용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이런 내용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대부분의 신앙은 하나님을 만족케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 내는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나는 절대 아니라 하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예외 없이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만 해도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와 복음서에 기록된 베드로는 너무도 다릅니다.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13-23) 이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극과 극으로 치닫는 자리에 각각 서게 됩니다. ‘복 되도다 이를 네게 알리신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는 칭찬의 자리에서, 조금 후에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는 책망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분명히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사단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생각보다 신비로운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베드로임에도 사단이라는 망신을 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는 주가 누구신지를 알 뿐만 아니라 주를 위해 열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내가 그 일을 저지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만큼 이렇게 목숨을 걸고 주를 편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편든 것을 사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베드로와 같이 주를 편든다고 하지만 그것이 주님을 앞질러 나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옥에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낙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 편이 되어, 주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있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 다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책망한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주를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베드로를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라고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순교의 신앙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를 사랑하여 목숨까지도 내놓고 주를 위해 앞장서서 큰일을 이루고자 하자 예수님은 그런 식의 이야기는 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연 베드로처럼 우리 신앙에 대해 자신이 있다면 그 자신감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혹 베드로와 같은 열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를 향한 충성심과 열정을 바쳤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마다하시고 도리어 사단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요한도 예수님의 사마리아 통과를 반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큰 열정과 충성심으로 저들을 불살라 진노를 퍼붓자고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너희가 감히 무례하게 대할 수 있느냐며 주를 편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신앙을 마무리 하는 말년에 이르러서 오직 사랑 외에는 할 말이 없게 된 것입니다. 불같이 무서운 성미와 주를 위한다는 열정으로 저주와 징계를 서슴없이 휘두르려고 하였던 그에게 이제 신앙의 최고 절정에 이르자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다스릴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벌 줄자에게는 벌을, 상 줄자에게는 상 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심판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까지 십자가를 지고 섬겨줌으로 그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러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가로막아 서는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꾸중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좇으려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라는 짐을 가볍게 여기느냐 아니면 무겁게 여기느냐 하는 싸움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 세 번이나 기도하시며 그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아시고 그 십자가가 가볍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것이 아버지의 원하심임을 알아 우리 마음에 쉼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런 아우성에 대해 예수님이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베드로와 달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로서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놓치고 살면 하나님의 자녀임에는 하나님의 일에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죽는 일 = 우리의 일

고린도전서 6장에 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1-11) 서로 싸워 이기려 하지 말고 ‘당하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만큼 놀라운 이야기도 없습니다. 싸움이란 서로 부딪칠 때에 나는 법입니다.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신자의 세상에서의 삶의 위치가 바로 하나 뿐인 손바닥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물거든 물리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를 교회로 데려오는 방법이 기독교에서는 희한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에 나가면 세상은 다 물어 버립니다. 그렇게 물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까 언제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나 보려고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물리면 물릴수록 교회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까지 물은 것을 놓지 않고 늘어지다 보니 결국 저들도 주님 앞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신들이 물고 있던 것보다 더 놀라운 주님을 발견하고 물은 것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물기만 하면 다 때려서 쫓아버렸으니 교회에 와보면 언제나 자신밖에 없는 신자가 많습니다. 이것이 열매 없는 신자입니다. 의자가 무거운 사람이 앉아서 힘들다고 투덜거리다 밑에서 쿡쿡 찔러댄다면 내다 버리지 누가 그 의자에 앉겠습니까? 신자는 주님의 뒤를 좇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와서 헌신하신 일과 또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다름이 아닌 주님처럼 당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변한 사건 중에서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잡혀서 옥에 갇혀 매 맞고 놓여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0-41) 주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아 당하는 일에 합격점을 받은 것을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요, 하나님이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비밀을 안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을 만들어 내는 그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제 더 이상 자기를 보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자기의 생각, 즉 사람의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이 같은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파묻힌 씨앗과 뿌려지는 거름과 같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된 직분입니다. 이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감히 주께서 걸으신 길을 잇게 하시는 이 놀라운 사명과 복으로의 권면을 아신다면 주저 말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의 제일 못난 것은 십자가의 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머리를 쳐들고 기어오르는 것은 뱀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그 머리를 수그리고 집어넣는 양떼입니다. 우리는 머리 쳐든 뱀인지 아니면 수그리고 집어넣는 양인지 스스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7-12)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뽑은 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십니다. 이러므로 주의 일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이나, 세상 것이 아닌 것으로 이루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올 때에 가지고 온 지식과 부 또는 명예나 권세 같은 것으로는 되지 않는 곳이 교회입니다. 잘 산다고 뽐내지 마시고, 잘났다고 우쭐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있으나 없으나 매일반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잘난 것으로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게 칼을 빼어 든 제2의 베드로가 될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죽는 일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주님의 뒤를 좇는 자의 길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이런 삶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요한복음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요한의 변화처럼 세워지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며, 그렇지 못할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신앙이라는 것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3. 하나님이 일을 생각하는 것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 차이 가 만들어 내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4. 변화 된 제자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합격점은 무엇입니까?

5. 우리가 주 안에서 해야만 하는 주의 일은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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