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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

본문 /  요18: 1- 5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뜨거운 열정에서 우러난 목숨을 건 충성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심으로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 가시고 되어 질 뿐입니다.


1. 제사장직

우리들이 가장 많이 안다고 하면서도 가장 모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요한 계시록 3장에서 잘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21) 이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3:22)라고 하심으로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5-18) 주를 안다고 하는 신자인데 실상은 알지 못하는 자요, 믿는다고 하는 성도인데 사실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하나님을 잘 알고, 잘 믿고,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대해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를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주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대로 믿지 못하면 핵심을 놓치고 만다는 경고입니다. 바로 이 같은 시각이 지금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기록한 관점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좋아하시리라고 여겼던 그 일들이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그토록 분명히 하고 싶은 구절이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당할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말로서 이것이 신자들에게 있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열쇠입니다. 주님께서 왜 당하시는 이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으며, 어떻게 당할 것을 알고 이 길을 갔으며, 이 십자가의 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질문들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 가면 이 말씀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5:7-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답니다. 물론 이 말씀의 뜻이 주님에게 어떤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결함이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표현은 마치 그가 아들이시라도 어떤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직무에 대한 표현입니다. 앞에서부터 보면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히5:1-3) 하십니다. 제사장과 그 사역에 관한 설명입니다. 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결함이 없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대제사장직에 순종하러 오셨기 때문에 고난으로 순종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사역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큰 비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는 이 말씀은 곧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대신하여 죽으시는 그 방법 이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께 능력이 없고 부족함이 있어서 그렇게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값을 위해 당신의 피를 흘리시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2. 방법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부활과 마지막 지상 명령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복음의 영광된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승리와 찬송과 환희로 채색되어 있기에 그 일이 아픔도 슬픔과 좌절도 없이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 뜻밖에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태복음 28장의 말씀과 같은 기록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끝부분은 환희와 승리에 휩싸여 있습니다. 게다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고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나가면 거칠 것이 없고, 반항할 자가 없어 실패할 수 없다는 그런 엄청난 자랑과 승리의 기대감 속에서 뛰어 나가도록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만일 잘못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거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는 어떤 죄악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삶이 늘 형통하고 승리한다고 하는 성경에서의 표현은 항상 영적인 것뿐입니다. 복음서를 이어가는 성경은 사도행전인데 우리는 사도행전을 언뜻 생각하기엔 상당히 형통하고 승리로워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거기에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있고, 모두가 기쁨으로 모여 찬송하고,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는 아름다운 교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죄 짖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는 사건이 있고, 베드로의 설교 한 번에 오천 명이 회개를 하며,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뛰어 다니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록들이 마태복음 28장의 말씀과 연결 되어 승승장구를 거듭해 보입니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사도행전의 기록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고 그 생명과 진리를 힘 있게 전파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대적들의 수그러들지 않는 살기등등한 공격들도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모두 흩어졌을 때나, 다시 힘을 얻어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진군해 나아갈 때나 마찬가지로 대적들은 그들의 권세와 힘과 지혜를 동원하여 제자들을 대적하고 제거시키려고 애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가면 대적들은 제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하는 사건이 나오고, 7장에 가면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나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할 때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니까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스데반 같이 설교를 하다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어 순교한다면 한이 없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얼굴도 천사와 같이 빛난 스데반이 설교를 했는데도 한 사람도 회개시키지 못하고 돌에 맞고 순교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절대로 승리의 연속으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에 가면 큰 핍박이 일어나 모든 신자들이 각처로 흩어집니다. 빌립 집사는 하는 수 없이 사마리아로 갑니다. 그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피해서 가는 것입니다. 온통 고생한 이야기들입니다. 12장에 가면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베드로가 다시 옥에 갇혔다가 천사가 풀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가는 데마다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고 믿는 자들도 많았지만, 방해하는 유대인의 세력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방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병도 안 걸리고 오히려 바울에게 병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거반 죽게 되는 일들이 자꾸 따르는데 대적들은 건장하여 살기등등하여 좇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데 마다 좇아와서는 소란을 일으키고 방해를 하고 송사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리하여 결국 바울은 쇠고랑을 차고 갇혀서 로마로 호송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 어디에 승리와 환희와 박수를 이야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전하는데 있어서 다른 방법들은 도리어 방해가 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어떠하리라고 기대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 기록하기를 ‘주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2장으로 가면 사도 바울이 이 두 부분을 이렇게 잘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 이것이 놀라운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승리적이고 승승장구 하는 방법들을 잘 쓰시지를 않고 오히려 붙잡혀 다니는 방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맬 수는 있어도 그 말씀은 맬 수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 대부분이 이런 방법들입니다.


3. 하나님의 일

디모데전서 1장에 가면 이것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지 의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죄인이라고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같은 자기를 향해 죄인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자기가 바로 죄인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6) 성경이 말씀하는 바울의 구원은 바울이 회개하고 고민할 때가 아니라 살기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습니다. 다메섹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을 잡기 위해 갔습니다. 그런 바울을 주님이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바울을 꺼꾸러뜨리시고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주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그를 향하여 칼을 들고 도전하였는데 그 주님께서는 내게 오래 참으시고 마침내 구원해 주셨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으며, 우리의 조건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바울을 주님의 사도로 세우신 것입니다. 사도가 되고 보니 그 자신이 스데반을 죽인 것이 오히려 은혜로만 구원받게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후로 그가 붙잡혀 가든, 고난을 당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영광이 될 것을 믿었기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고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한 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도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 내 힘과 방법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요구가 에베소서 4장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이며 성경이 목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신자들을 보낸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의 지체가 되어있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우리 신자들은 자라나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4-16) 예외 없이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보냄을 받습니다. 신자가 되면 누구든지 그 자신이 자기의 몸을 주관하거나 결정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몸은 머리가 결정하며, 머리는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합니다. 신자의 삶은 이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나아가도록 의도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이 우리들을 통해 제대로 타나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되신 주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겼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다른 심령들을 살리는 자가 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야할 머리되신 주님께 붙은 지체들입니다. 이것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들이 연합하여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리 하나가 길면 한 쪽이 짧은 것이고, 한 쪽 팔이 짧으면 자연히 다른 쪽 팔이 길어지고 맙니다. 다시 말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못하시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지어져 가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요구받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가져야 할 가장 큰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양보하고 용서하며 기다리고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약의 서신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칼을 뽑고 휘두르며 모든 권세와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여 멋있게 신나게 살아가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이런 인격적인 이야기와 신앙 속에서 양보하고 기다리는 이야기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는 깊이 관여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신앙을 갖는 것이 안전하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만 담그고 쌀을 씻을 순 없는 것입니다. 휘휘 저어야 합니다. 집안이 깨끗해지는 방법은 화장실과 부엌이 없으면 그 집은 더러워질 이유가 없습니다. 안 먹고 안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식투쟁하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19) 다른 복음서에서는 너희가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이기고 승리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권세를 가지고 가라는 등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 요한복음 끝에서는 좀 다릅니다. 젊어서는 네가 가고 싶은 데를 갔었지만 이제는 가고 싶지 않은 데와 가고 싶지 않을 때에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주님이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해 열심을 가졌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사단아'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부활 이후 사도권을 회복한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지혜요, 복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권세라는 사실을 믿고 그 앞에 온전히 항복하여 기다리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제 내 힘으로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능력과 긍휼로 세상과 교회를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드러내는 삶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의 기록관점은 무엇입니까?

2.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의 이 ‘당할 일'이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왜 중요     한 신앙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까?

3. 하나님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우리가 기대하는 방법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4. 주님을 핍박하던 바울을 택하심은 우리에게 무엇을 더 확실하게 가르치시려는 것입니까?

5. 신자로서 우리가 요구받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며, 그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며    복인 것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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