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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해된 신앙과 합격점을 받는 신앙

본문 /  요18: 1- 5


요한복음 18장 이후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수난의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뒤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이 일들이 당연한 일어날 사건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며, 생명의 말씀을 전하신 주님이셨음에도 결국은 고난을 감수하시고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대접을 받으셔야만 하는가 하는 점은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그것도 로마 병정과 같은 이방인들에 의해 받는 고난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그토록 메시야를 사모하며 제사를 드리던 자들 그것도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런 내용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바리새인

오늘 본문 3절입니다.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요18:3) 여기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가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요, 민족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사람들을 얻어서 잡으러 오는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예수님은 죽음을 선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의 핵심과 인간들이 마음대로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의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충격적인 묘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격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그런 오류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추적해서 우리도 무엇을 조심해야 될 것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바리새인은 복음서 전체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이란, 분리한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이스라엘이 외세의 압력으로 처음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하여 여러 해를 고생하고 또 지금은 로마에게 지배당하며 유대민족이 이어온 전통들, 즉 신앙적인 순수성을 잃어버린 데 대해 분개한 분리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민족의 혼을 지키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자고 일어났던 알고 보면 뛰어난 민족 수호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으로 이스라엘이 가졌던 신앙을 지키자고 힘쓰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크게 욕을 먹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눅11:42-44) 여기에 나오는 것만 보아도 겉으로는 모든 신앙적인 명령들을 다 지키고 있지만 본심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집 뜰에서 뜯는 채소 같은 것도 십일조를 할 정도로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속으로는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 앞에서 박수 받기 위한 종교의 행위가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칭찬받기 위해 하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더 확실히 말씀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6:1) 여기서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과 하나님께 받는 칭찬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종교 행위에서 가장 유명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예로 들어 사람에게 보이려는 종교 행위와 하나님께 보이려는 종교 행위로 나눠서 말씀하십니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 외식은 겉만 장식하고 있다는 것으로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종교 행위는 사람 앞에 보이려는 치장이었지, 하나님께 보이려는 진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할 때도 나팔을 불어 내가 구제하니 다 와서 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다'고 하십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마6:5) 기도는 성전이나 회당에서 하면 되는데 큰 거리 어귀에서 하는 것은 바로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자도 ‘하나님의 상급이 없다’고 하십니다. 또 금식에 대해서도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마6:16) 그렇게 하여 사람들에게 박수 받으려 애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을 공격한 내용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이 일로 인해 예수님께 원한을 품게 되어서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에 갑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의 반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충돌하는 변론이 몇 군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 충돌

마가복음 3장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 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막3:1-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 가셨다가 한 쪽 편 손 마른 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인데 예수님께서 일을 하는가, 안 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병자의 손을 고쳐주면 안식일에 일한 격이 되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므로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빌미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분명히 선을 행하는 것이 옳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율법은 자기네들을 생색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이 사람을 유익하게 만들며 사람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한 법칙이라는 것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모든 신앙은 여기가 분기점입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어떻게 더러운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건져 내시는 것인가 하는 것이지, 이것을 지키면 잘 난 사람이고 못 지키면 죽여도 되는 사람으로 판정하기 위해 신앙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 바리새인들을 통해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지금껏 쌓아 놓은 지위가 예수님의 지적과 밝혀낸 말씀의 내용으로 무너지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창피를 당하고 그들의 지위가 무너지는 것이 싫었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아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39-44)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광을 얻기 위해 하나님마저 동원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신앙과 경배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 자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경과 기독교라는 종교를 동원해서 자기를 증명하며 자기를 치장하는 것 외에 더 이상 진리와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입니다.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 대한 공격이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마23:1-7) 그리고 13절에서 17절 또 23절에서 28절까지도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모두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고 섬기러 왔다고 하였으며,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 놓으시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향해서도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시고는 끝에 가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유독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에 대해서만은 싸움을 거셨고 무서운 저주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최고의 내용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은총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장 많이 공격한 것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과 신앙을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죄사함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의 법들을 지킬 수 있다하여 은혜가 아닌 법을 지켜 자기를 치장하려는 것에 대해 공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것이 이 싸움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착한 사람이 되자, 의로운 사람이 되자, 봉사를 많이 하자는 것들은 다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는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으므로 오직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회개하는 마음이 가장 신앙의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도 우리에게 다른 제사보다도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스스로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실수와 범죄에 대해 질책하지 않고 도리어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간섭을 구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오늘도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금식하며 십일조 하며 성경 말씀을 외우는 것으로 자기네들의 지위와 자랑을 드높이고 있을 뿐이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3. 신앙

그들의 행위 중에 하나인 금식에 대해 보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4-7) 밥을 안 먹는 것이 금식이 아니고, 날짜를 따지고 경쟁하여 자랑하는 것도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나의 양식을 삼겠고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세상의 것을 먹어 내 육체의 힘과 세상의 힘을 길러서 세상을 정복하겠다가 아니라, 금식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세상의 방법과 힘을 축적하지 않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만 힘과 지혜를 삼겠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며칠 동안 굶었느냐가 자랑이 아니라, 실제로 내게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나가는 것으로 점검하여 확인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하는 하나님의 꾸짖음입니다. 결국 모든 신앙의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이제 그 받은 사랑을 이웃을 향해 나누는 자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이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행위들을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기 위한 눈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1-5) 외식의 가장 굵은 원리가 남의 티를 보는 것입니다. 누구를 보기만 하면 그 사람의 결점과 잘못을 빨리 집어내는 것이 자랑이고 보기만 하면 척 알아내는 것입니다. 자기는 세수도 안한 처지에 저 사람은 세 번 밖에 안 문지른 얼굴이라고 척 알아내는 것이 자랑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자기의 들보를 빼어 내는 작업으로 자기가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마땅히 나아가야 할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지 그가 아는 모든 것으로 저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식으로 판단하며 사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하는 척 심판하고 살면서 나는 그와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를 잡으며 자기 자랑으로 삼는 외식의 삶은 아닌지 항상 깨닫고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4)라고 하였습니다. 하루살이라는 아주 세밀한 것까지 율법을 지키려고 걸러 내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안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내가 알았도다’라는 지적 그대로 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바치면서도 정작 예수님은 죽이고 있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킵니다. 우리 자신이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무서워하셔야 됩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신앙생활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서로가 내가 그래도 ‘너 못 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에 쉽게 유혹을 받고 시험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과 같이 됩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9-13)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우린 예외 없이 병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오해는 자신을 죄인이라, 병자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계속 시비를 거는 것이 왜 병자와 식사를 하며, 식사를 할 때에 왜 손을 씻지 않느냐에 집착 했습니다. 마태라는 죄인 하나를 건져내고, 죽었던 심령을 살려 내는 것보다도 손 씻었냐, 안 씻느냐가 더 중요하게 보였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경쟁 상태에 서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존심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지기 싫습니다. 여기서 서로를 향하여 칼을 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원하시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모두를 향하여 참으며, 용서하며,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들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치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우리 자신을 견주어 인간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신앙을 전진시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어떤 수준에 와 있느냐 하는 것은 각각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 이전에 그 신앙이 어떤 방향과 목표와 원리와 근거 속에 있느냐는 같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언제나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형제의 티를 보며,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그런 날카로움을 갖지 마시고 또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은혜와 긍휼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나에게 용서가 있으며, 회개와 눈물이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오늘 이 시간에도 주를 못 박고 있는 자인가 아니면 그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자인가를 확인하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과 삶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의 신앙은 어떤 내용들이었습니까?

2.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잘못 가졌던 생각과 잊어버린 내용은 무엇입니까?

3.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과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4. 은혜와 사랑을 말씀하심에도 그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공격한 것은 무엇입니까?

5.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금식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6.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오해한 것과 우리가 조심해야 할 신앙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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