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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께 붙잡힌 우리의 운명

본문 /  요18:12-27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려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라는 말씀을 통해 실권자는 안나스인 것같이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이 가야바와 안나스에게 가는 동안에 베드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냥 베드로의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두 사건을 겹쳐 놓음으로서 베드로의 세 번 부인에 초점을 맞춘 다른 복음서 이상의 의미를 이 사건 속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1. 죄인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33년간을 사셨는데 그 마지막 삼년 동안은 여러 기적과 큰 권능 속에서 천국을 증거 하시고 복음을 설파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였을 뿐 아니라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요18: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을 말함이 아니라, 나라가 민란이 일어날 정도로 이 사람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으니 그를 죽여서 우리의 지금의 정치적 위치를 더 확고히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가지시는 사랑과 구속의 방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상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의 책임자입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이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덤볐습니다. 뿐만 아니라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하며 주의 권능과 이적을 경험하였던 제자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마저도 이 주님의 수난 속에서 딴 짓을 하고 있더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은 것이 요한복음 18장의 기록목적입니다. 다시 말해 빛이 세상에 왔으되 그 빛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더라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제일 가깝게 지낸다고 여겨졌던 대제사장도 그랬고 심지어는 예수님 곁에서 가까이 지냈던 수제자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력으로서는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어떤 절망의 벽이 가로 놓여 있더라는 것이 요한복음이 끝까지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권능으로 영적인 눈을 밝히 뜨도록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그가 제사장이 아니라 수제자 베드로라고 할지라도 별 수 없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미 중생하여 밝히 보는 자 된 요한이 과거에 보지 못하던 시절의 그 무지함과 답답함 그리고 그 한계성에 대해 과거를 돌이켜 보며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세상에 빛 되신 주님이 오셨으나 사람들의 심령이 어두워져 있기에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하더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7장에 보면 더 실감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15-24) 이 기막힌 인간의 현실이 사건화 되어 나타난 한 경우가 바로 오늘 요한복음 18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얼마나 인간의 의리와 열심으로 그리스도의 편을 들려고 했었는가 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말하기를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버리지 않겠나이다. 어디까지든지 가겠습니다. 죽는 자리까지라도 주를 따르겠다.’고 장담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쳤는데도 멀리서라도 잡혀 가는 주님을 뒤좇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결심과 생각과는 상관없이 한 계집종이 와서 ‘당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까?’라고 했을 때에 본인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과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못남과 자신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후회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많은 열심으로 주를 좇고 주님의 편을 들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서는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부인하던 베드로와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베드로를 비교해 보십시오. 매 맞는 것을 기뻐하는 베드로가 됩니다. 그러면 이전에 주님을 부인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 드러났던 것은 결심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래서 후에 더 많이 결심해서 매 맞고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것 때문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열심과 자기 결단으로는 결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지금 요한복음에서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인

결국은 누가 주인이 되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자신이 원한다 하더라도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인간은 선한 것이 주인이 아니라, 악한 것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것을 하고자 하는 결심과 마음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결제 올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제를 받을 때는 언제나 악한 결제만 내려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못합니다. 악과 죄가 내 주인입니다. 종은 자기 좋아하는 대로가 아니라 오직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20)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분석해내기 위해 베드로의 실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를 사모하여 주를 좋아하며 의리를 지킬 진심의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놀랐을 때에 베드로만은 칼을 뽑아 잡으러 온 자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던 사람입니다. 다 도망갔지만 베드로만은 떨면서라도 좇아 온 의리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저주하고 부인합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이 우리들에게 밝히고 싶어 하는 죄 아래 있는 인생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절망적인 인생의 실상을 외치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인생입니다. 내가 아무리 선한 생각을 하고 덕을 세우려고 애를 쓰고 열심을 낼지라도 결국 결제되어 내려와 행하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기에 악한 것이 나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에게 매여 있고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밖에 짓지 못 하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통곡하는 일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의 말씀은 그 어찌할 수 없는 시점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무엇이 해결되었는가를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살기 힘들고 집에 상비약이라고 해야 빨간약이 전부일 때에는 누가 배 아프다고 하면 배에다 그 빨간약을 발라 주며 이제 다 낫을 것이라 했습니다. 말 그대로 만병통치약처럼 쓰였던 것입니다. 진단도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몰랐고 알아도 약도 변변치 않았기에 무조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따져보면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은 아무 곳에도 효과가 없는 약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과 믿고 있는 복음이 제대로 분석 되어 있지 않으면 만병통치약이 될 위험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이 만병통치약은 도리어 만병불통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심각한 일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 아래 종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실상을 처절하게 묘사해 놓고 25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상)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우리가 선을 원하고 의를 원해도 우리가 주인이 아니기에 선을 행할 수 없더라고 하여 죄의 종으로서 절망적인 상황을 이야기 해놓고 하는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알 수 없는 이야기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하) 하는 말씀입니다. 이 설명이 상반절에서 이야기한 감사에 대한 바른 설명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도리어 이 설명은 앞에서 제기한 문제의 내용을 재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다시 모아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절대 절명의 순간인데 거기에 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갔던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의 변명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 몰고 간 이유가 내가 선을 요구하고 의를 사모한다 할지라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기에, 내가 아무리 거룩한 것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결국 나는 죄와 악한 것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악할 일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 감사함의 이유를 들기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말이 안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의 해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누가 나를 장악하고 있느냐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던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죄가 나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생겨진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나를 장악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와 사망이 나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절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가 여기 로마서 8장에 있는 바와 같이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이 우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를 붙잡고 있던 주인을 깨고 새로운 주인이 우리를 붙잡게 하는 방법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 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사의 이유가 내가 내 힘으로 율법을 지켜 사망과 죄의 권세를 깨뜨림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대신 해 주셨기에 그래서 나를 은혜의 영생의 법 아래로 잡아 오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다시 조명해 보면 제자들의 배신과 무기력함이나 대제사장의 살기 앞에서 아무런 시비가 없으신 주님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요한복음은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을 원했다든가, 그 깨우침에 대해 어떤 진전이 있었다는 등의 기록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란, 있을 수도 없었고, 주님께 듣고 배우고 한 모든 것이 결국은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주를 사모하고 섬기고 싶어도 그들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3. 운명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12-21) 지금 읽은 본문 중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같이'입니다.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의인 되며,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인간에게 침투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우리 모두가 의인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대표의 일을 대신하러 오셨으되 첫 조상같이 죄악과 죽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의와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으로서 인류의 대표라는 의미에서의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그가 인류의 시조였기에 모든 인류의 신분을 정해 버렸습니다. 죄인이 됨으로 모두를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사 두 번째 아담이며, 마지막 아담이 되십니다. 그래서 아담이란 대표자란 뜻이 있습니다. 친히 사망아래 들어 가사 죄값을 치르시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죄의 형벌을 받으사 인류 모두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내리실 죄를 다 벌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일을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사 이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새로운 인류의 시조로 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의미에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선상에 불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죄인된 것같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후손이 정당하게 못 살아도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복음입니다. 뭘 안 해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고 천국에 간다면 예배당에는 왜 나와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나가 노셔도 천국 가는데 지장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가서 노는 것이 더 손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재미있어 보이고 익숙하고, 예수 믿는 것은 재미없어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 믿는 맛을 모르면 예수 믿는 것같이 재미없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가 인생이란,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두시지를 않습니다. 꽉 붙잡으시고 놓으시지 않고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6-13)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택하고 에서는 버렸답니다. 여기 말씀의 요지는 왜 에서는 버리셨느냐가 아니라, 구원이란 우리 자신에게서 어떤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뭐가 잘나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왜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이셨는데, 야곱을 보니 사실 형편없었고 인간적으로 허물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문제 많은 이 야곱을 전 생애를 걸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고 마시더라는 이야기를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4-16) 쉽게 말해서 내가 회개 잘해서, 내가 믿어서 구원 얻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니 회개하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믿고 열심 내어 일하는 것은 모두 결과입니다. 주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택해주신 결과로 나타난 일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감격과 감사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늘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노니'라고 하는 기록을 하고 있으며,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를 흔들 자가 없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주장하고 있지 사망과 죄가 우리를 주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감사할 수밖에 없으며, 찬송할 수밖에 없으며, 담대할 수밖에 없으며, 자랑할 수밖에 없으며, 승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 평안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요한이 대제사장들과 베드로의 사건을 동시에 기록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2.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죄와 악이 나의 주인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만병통치약이 만병불통약에 될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예수님을 믿기 전후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음에도 감사와 답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며, 성경의 말씀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6. 과연 주 안에서의 우리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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