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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경이 보여주는 부패한 인간의 실상

본문 / 18:19-24

 

오늘 본문은 인간의 부패함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는 가운데 혹시 우리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그것은 꾸짖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했는가 하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부패함과 무능 속에 빠져 있는가 하는 실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한다고 하여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고 부끄러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간다면 아직 신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지적으로 도리어 자신이 종교적인 치장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반성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인간의 본성

먼저 본문 19절부터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18:19-21)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상당히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지금 대제사장은 ‘네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고 그렇게 큰일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너의 제자들은 하나도 없느냐? 네가 선택하여 세운 그들은 지금 왜 하나도 네 옆에 없느냐?'하는 식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비난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끼리의 경쟁에서는 이 같은 비난이 항상 벌어지는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보다 누군가가 잘 나가는데 그 사람에게서는 흠 잡을 것이 없으면 그 자식까지도 문제를 삼아 시비를 걸어서 그 사람을 깎아 내리고 자신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격한다는 게 ‘자기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한 주제에 뭘 하겠다고 그래' 하는 식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소리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 내게 자식 문제로 시비를 걸고 들어올 때에 그것만큼 속상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대제사장이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사로를 살리고,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쳤다면서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하며 가르쳤던 그 제자들은 지금 어디 갔느냐?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당신을 팔아먹지 않았더냐?'라며 희롱 섞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야 말로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며,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 전체가 얼마나 패역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대제사장을 통해 나타내 주고 있음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에 관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곳이 마태복음 26장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26:57-68) 이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런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적인 선입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싶어서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살피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결박하고 심문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이 예수님을 향해 갖고 있던 증오심을 충족시키고 급기야는 죽이려는 구실 만을 찾는데 온갖 억지를 다 갖다 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일 구실을 찾기 위해 아무리 증인들을 모아도 죽일 만한 이야기가 될 것이 없어서 거짓증거를 얻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이 와서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성전이라는 건축물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리켰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도 인간을 완전하게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완성하실 구원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자들은 그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하지 않고 단지 올무에 걸어 넘어뜨릴 구실 만을 찾는 것 외에는 그 말씀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 부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며, 앞으로 심판 날에 인자가 하늘 아버지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타고 올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하고는 매질하고 이제 사형에 넘겨주게 됩니다. 여기서 유의해서 살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사람 사이에 증오심을 갖기 시작하면 꼭 대제사장과 같은 그런 행동 양식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한 말의 본의가 무엇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말꼬리를 붙잡아서라도 상대방을 칠 근거를 삼고 싶은 것이 우리의 죄악된 성품이며, 본능입니다. 결국 우리의 본성 저 밑바닥엔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요점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빛을 비추시어 영생을 주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손해 끼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병든 자를 싸매시며 고쳐주심으로 사랑으로 두 손을 펴고 다가오신 주님께 오히려 멸시의 손바닥으로 내리쳤습니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닌 대제사장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2. 내 안의 죄

오늘 본문의 대화 속에는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 가르치신 교훈과 제자들에 관하여 물으니 ‘내가 항상 드러내어 놓고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대제사장쯤 되는 네가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는 식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대제사장이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과 행적에 대해 하나도 깨우친 것이 없고 다만 죽이려는 마음만 가득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성 깊이 뿌리박힌 부패성인 것입니다. 화상을 입어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람이 처음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자신의 얼굴을 뜯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깰 수밖에 없듯이 빛 되신 주님이 나타나시자 자신의 추하고 부패한 모습이 드러남을 알고 스스로를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 빛을 끄려고 덤벼들고 있는 것이 대제사장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끊임없이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되어야 할 인간에 대해 끝까지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그 분기점이 밧세바 사건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전기에서는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좇아오는 사울 왕을 향해 한 번도 거친 말이나 어떤 횡포를 부리지 않고 늘 말없이 도망만 다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여 다윗의 생애를 맺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게 하시려고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 일로 다윗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집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에는 대부분 다윗 외부와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 이후에는 모두 자신에 관한 싸움들입니다. 자신을 향해 일어난 반란 사건들도 모두 스스로와의 싸움으로 수렴해 나갑니다. 그래서 다윗은 신앙의 사람으로 철저히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온 유명한 고백이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알게 된 인간이란, 얼마나 죄악 되고 부패하며 무능하며 완악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아 그의 말년에 이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대제사장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인간의 죄란 얼마나 무서운가? 그 부패하고 더러운 죄가 바로 너희 속에 있느니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가에 대해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신이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굴복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깔고 앉아야 속이 편한 자들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들로 인해 자신의 겉을 미화시키는 것으로 만족해 버려서 속에 있는 것을 고쳐내지 못하고 허송세월 하는 것만큼 신앙의 큰 실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남아있고 횡포가 남아 있는 이상 우리는 참 신자의 자리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겉으로 얼마만큼 종교적인 행위를 하였느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점검하지 말고 변하셔야 됩니다. 우리의 눈에 사나움이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에 시기와 증오와 훼방하는 마음이 없어지셔야 됩니다. 오직 용서와 사랑과 평안이 우리를 주장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대제사장들이 왜 이런 일을 했으며, 그들이 하는 일에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그들의 인생이 존재하였기에 그런 일들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던 것입니다. 자기 하나 밖에는 목표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들도 혹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모든 것은 겉치장과 구호에 그칠 뿐 실상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만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3. 전적 부패

다시 마태복음 26장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이 거짓 증인을 세웠는데,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잠잠하자 대제사장이 유도 심문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26:63) 여기서 대제사장이 무엇을 들먹였는지 보십시오.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제사장 직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되 오로지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죽이려는 그의 마음의 계획을 결실시키려는 데에만 쓰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답변을 하자 그 다음에는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마26:65)고 합니다. 마침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다니 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더는 못 참겠다 하여 옷을 찢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잘난 행동이지만 바로 그 행동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 누가 주일을 빼먹으면 참지 못하고 ‘주일에 교회를 빼 먹다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 자체는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 말을 하고는 사람을 죽입니다. 주일에 교회 빼 먹었다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입니다. 그 말을 한 것으로 상대방을 이익 되게 하거나 분발 시키는 일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살리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로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도다'하면서 자기 옷을 찢었더라고 했습니다. 삼자가 보면 대제사장이 오죽하면 옷을 다 찢겠나 하며 저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행동입니다. 대제사장은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채우기 위한 종교적인 형식을 빌린 동작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알아 볼 가능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장로들, 공회원들, 로마병정들, 빌라도, 제사장 등 이 모두들이 충분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실수하여 못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예 못 알아 본 것입니다. 결국 인류는, 죄인이기에 그리스도를 알아볼 능력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저들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된 인간의 부패성과 어두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 보시면 예수님은 제사장과 빌라도를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사장을 똑같은 선상에 놓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쪽에서는 무능함을, 제사장 쪽에서는 부패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모두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모를 뿐 아니라 증오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 같은 자리에서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제는 신구약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공통된 지적입니다. 말라기 1장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6-10) 이것이 구약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는 예배, 우리가 갖는 종교, 양심, 도덕, 윤리 등 어떤 율법의 행위로도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릴 수 없으며 또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도 보면 제사장들을 꾸짖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내 제단을 경멸히 여기는도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언제 주를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야바도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갖고 있고 하나님 편을 든답시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늘 그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 지를, 이웃을 사랑하는가 안 하는 가로 보십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기껏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어놓고 하나님 편을 들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는 열심을 부렸는데 결과는 사람의 심령을 죽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열심만이 능사가 아니라, 거기에 사랑이 있는가를 보십시오. 거기에 인내가 있고, 용서가 있고, 긍휼이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것이 없으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부분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만일 성도가 이 부분을 오해한다면 모두 칼을 든 베드로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와 용서와 사랑 안에 있는 지에 대한 감사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 되기 원하신다면 제일 먼저 긍휼을 배우고, 은혜를 구하고, 용서를 소유하시고 인내를 배우십시오. 아직 우리들의 마음에 심판이 있고, 조급함이 있고, 분노가 있고, 시기가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배워서 소유하게 되신다면 제일 먼저 평안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함이 없는 감사와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복의 사람이 되시어서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 사랑으로 나누며 세워지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을 심문하는 대제사장들에게서 드러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무엇입니까?

2. 다윗의 삶에 있어 전반기와 후반기의 달라진 내용과 다윗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이 가졌던 궁극적인 목표와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4. 우리가 하는 옳은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5. 말리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구약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일 먼저 가져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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