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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시는 하나님

본문 /  야고보서 4: 5-10


1. 성령의 사역

지난주에는 시기와 다툼이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4:5)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우리를 향하여 시기하기 까지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적이고, 정욕 적이고, 마귀 적인 시기와 다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성령께서 우리를 향하여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이 말씀을 헛된 줄로 여기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알고 믿는다면 어떻게 시기와 다툼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을 삼으셨기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이미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고 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이 임하신 것은,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기에 세상과 벗되지 말고, 마귀와 친하지 말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하여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이기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시기하시기 까지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도록 방치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약4:6) 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는 행함만 이야기하고, 은혜가 없는 것처럼 많이 알고 있습니다만 보통 은혜가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은혜가 바로 우리 속에서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하시는 그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시기하며 사모함으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3-30)고 합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의 모습은 탄식하게 됩니다. 믿는 자들은 우리 몸의 구속을 바라며 기다리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소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기다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연약하기에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보이는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와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데 그 선이 바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령의 탄식의 간구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바로 미리 정하신 자들입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또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그렇게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미 영화롭게까지 하셨는데 이러한 자기 백성들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성령께서 시기하기 까지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만 지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시고 천국에서 만나보자고 올라가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속에서 시기하시기 까지 사모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사모해야할 주님을 사모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사모하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큰 은혜를 매일 삶 가운데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다른 곳을 보며 살기에 못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이젠 눈 좀 크게 뜨고 이렇게 우릴 위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성령의 시기, 즉 하나님의 질투가 왜 더욱 큰 은혜가 되는지 구약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질투

먼저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하나님은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34:14)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기에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언약을 세우시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가까이 왔을 때에 미디안 여인들의 유혹을 받아 우상에서 절하고 간음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전염병을 보내십니다. 그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로 두 남녀를 죽였을 때에 전염병이 멈추었습니다(11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투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도 하지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 한 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질투의 양면성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로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대신 하는 질투로 인하여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스가랴서 8장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슥8:1-8)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함으로 성읍이 황폐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다시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배반을 하니 아예 배반을 하지 못하도록 더 완벽한 은혜를 베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투와 인간들의 질투와의 전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4:5)는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드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데 한 눈 팔거나, 다른 곳에 마음을 두면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눈 돌리고 마음 주는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에게만 마음 두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 세상이 다 불에 타 없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악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얼마나 보암직한 것들이 세상에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돈만 있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입니까? 그런데 왜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불태워 없애버리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 질투심으로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심판이기도 합니다만 더 이상 세상 적이고, 정욕 적이고, 마귀적인 것에 마음 빼앗기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조치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과연 우리에게 공포로 다가옵니까? 아니면 감사로 다가옵니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공포가 되겠지만,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큰 은혜로 다가올 뿐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그 마음이 나뉘어져 사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향하여 시기하기 까지 사모하시는 그 은혜로,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하신다는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으로 달려가지 못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한눈팔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들은 명령이 아니라 사랑으로 들려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3. 사랑의 권면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만한 자란 어떤 자입니까? 교만이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아담의 후손은 자기 힘을 의지하면서 살고자 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란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겸손이라면 야고보는 도덕 선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겸손한 자란 더 이상 자기의 행함에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내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보는 자라면 ‘주여! 내가 이렇게 교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주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니 고맙고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7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고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마귀의 그런 유혹을 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원하고 있다면 마귀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친구가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물리친 세상의 영광을 우리도 포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녕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도 가까이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손이란 외면적인 행위들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행동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적이고, 정욕 적이고, 마귀적인 일들에서 우리의 손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성결케 하라고 합니다. 두 마음이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늘 둘 다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제일 잘 속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의 복을 받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면 세상에서 실패하고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나오고 열심을 내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성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9절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 세상을 거꾸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슬픔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였다고 잔치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도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성공하고 웃음과 즐거움으로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절에 다니는 사람이나 심지어는 불신자들 까지도 다 복이라고 여기는데 어떻게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슬픔으로 바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만 사모하게 합니다.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은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그런 것들이 사랑스러워 보인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더 큰 은혜를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10절에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되기에 자기를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높아지기를 애쓰지 자기를 낮추지 않습니다. 혹시 일부러 몸을 낮추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높아짐을 위하여 낮추는 것이라면 그것이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낮출 사람이 없는데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나온다면 이것은 더욱 큰 은혜를 받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은 세상의 정욕과 싸우며, 마귀를 대적하고, 손을 깨끗이 하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아니하고, 세상의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슬픔으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구하는 자가 아무도 없기에 성령께서 시기하면서까지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세상을 향해 걸어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지 아니하는 우리를 향해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하여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리고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이 우리를 살리며,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말씀 앞에 아멘이 되어 지고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과 마음이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매일의 삶이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와 성령의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가 탄식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질투의 양면성은 무엇입니까?

4. 배반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로 이루어 내신 구원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5. 오늘날 어리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투의 사랑의 조치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하나님 안에서의 교만과 하나님 안에서의 겸손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8. 세상을 거꾸로 보라는 의미와 주 앞에서 낮출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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