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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진리를 듣고도 육신적은 삶을 사는 자

본문 / 요18:33-38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입니다. 이 말이 어떤 분위기에서 나온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빌라도가 갖는 이 중요한 대화의 내용들을 놓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1. 빌라도

성경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과 대화할 당시 그의 심경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흔들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관정에 들어와서 예수를 불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직접적인 답은 피하고 “그 질문이 네가 스스로 하는 질문이냐 아니면 남에게 들은 말이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지금 빌라도에게는 두 가지 의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단결시켜서 로마에 반항할 실제적인 지도자감이냐 하는 의혹이 그 하나입니다.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마저 로마의 붙어서 자기네들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는데 목적이 있었지 국가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제 제대로 능력 있고 백성들의 마음을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기만 한다면 민중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로마에 저항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 대한 경계심이 빌라도에게 없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문둥병자를 단숨에 고치며 물 위로 걸으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능력을 가진 이 그리스도가 어찌하여 이같이 험한 꼴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있기만 하는가 하는 점이 두 번째 의혹입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으로서 자기의 지위를 지키려는 질문이며, 두 번째 질문은 영적이고도 종교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빌라도의 지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 속에서 이 같은 두 가지 의문들을 동시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되물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묻는 너의 질문이 네 지위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한 질문이냐 아니면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묻는 질문이냐?"라는 뜻으로 “이것이 네 스스로 하는 질문이냐 아니면 남이 네게 한 질문이냐?"라고 묻는 말입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다시 말해 ‘내가 로마인이지 어찌 유대인이더냐?'라는 이 말은 나는 지금 나의 세상적 지위와 정치적인 책임 하에서 네게 묻고 있는 것이지 진리에 관해서는 네게 묻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당하는 일이 바로 지금 빌라도와 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그래 너나 잘 믿으라. 너나 천국 잘 가라. 나는 지옥에나 갈테니'라는 이 같은 태도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완악하고 죄악된 모습을 빌라도를 통하여 잘 묘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빌라도의 태도에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을 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서 너희들에게 넘기우지 않았을 것이니라" 빌라도는 이 말에 겁을 먹게 됩니다. 아니 그의 제자들이라고는 열두 명 밖에 없는데 게다가 그 중 하나는 배반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는데 내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가서 싸워 나라를 쟁취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대로라면 보이지 않는 어디에 감추어 놓은 부대가 또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왕이 맞지 않느냐?' 그러자 예수님이 “그렇다. 나는 왕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 드디어 나와야 할 말이 나왔으므로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연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과 진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를 이렇게 결박하여 넘겼으며 나도 세상에 관한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너의 포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다시 말해 무슨 진리가 밥 먹여 주냐는 뜻의 말입니다. 이것으로 대화가 끝납니다. 진리가 뭐냐는 말을 던지고는 나가 버립니다. 결론적으로 백성들에게 ‘죽일 만한 죄가 없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못 박으시오'라는 여론에 밀립니다. 할 수 없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는데 내어주고 맙니다. 여기서 빌라도의 태도를 보십시오. 분명히 예수님에게서 죽일만한 죄를 찾지 못했음에도 예수님을 풀어줌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을 통하여 영적이며 종교적인 충격을 받고 있었음을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같은 충격이 그의 세속적인 정치 생명을 포기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만큼 빌라도의 마음이 세상적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요19:7-16) 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빌라도의 마음은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놓으려는 마음도 있고, 자기의 정치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권한으로 사형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서는 더욱 열심히 놓아주려고 하지만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고 채찍질 하게 합니다. 그것이 또한 마음에 걸려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입니다. 이에 사람들이 그렇게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이 왕’이라고 써 달라고 하자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미련함과 완악한 갈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2. 밭의 비유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천국 비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3장입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 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 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 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8-23) 이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우리는 보통 밭의 비유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옥토가 되자 즉, 길가나, 돌 짝 밭이나, 가시떨기가 되지 말고 옥토가 되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자는 식으로 자주 이해되어집니다. 이것이 밭의 비유라면 사람들이 옥토도 있고, 가시떨기도 있다고 구별할 수 있지만 이것은 씨 뿌리는 비유이므로 그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한 알씩 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씨앗을 손에 잡고 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씨를 뿌릴 때에 대부분은 밭을 갈아놓은 데 떨어지지만 더러는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 짝 밭에도 날아가는 법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밭과 같은 것이 아니라, 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씨 뿌리는 비유로 되어있지, 밭의 비유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좋게 가지자라는 싸움이 아니라, 결실된 자는 좋은 밭이요, 결실되지 못한 자는 좋은 밭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좋은 밭이 되었다 안 되었다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생명의 말씀이 좋은 밭에 떨어지지 않은 한은 아무리 좋은 씨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좋은 밭은 누가 만듭니까?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바뀝니다. 우리의 마음에 씨를 뿌리며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바꾸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같은 예수님을 보아도 빌라도와 같은 상태에서 아무리 보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오직 십자가로 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 하는 핵심은 십자가로 그 마음의 밭이 바뀐 자는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안 믿었지만 나는 믿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들은 사랑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사랑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수난 사건의 목표입니다. 바로 우리가 은혜 입은 자이고, 사랑을 입은 자이고, 복을 입은 자들입니다. 옥토가 되어 씨앗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안 되고, 빌라도조차 안 되었던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되게 하신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은혜

우리가 여기서 빌라도의 혼동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연인인 빌라도 즉,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밭을 바꾸어 주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 교훈에 대하여 얼마나 당황해하며 갈팡질팡하며 드디어는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처량한 모습을 오늘 본문 빌라도를 통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19-24) 그런데 왜 손은 씻었습니까?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죄를 발견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민란이 나려하는 바람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에 분분하였지 막상 주님의 편은 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빌라도를 성토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연인이란, 진리와 구원과 영생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하고 맥이 없는가 하는 사실을 잘 지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골자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세상의 재리와 염려에 막혀서 결실치 못하는 좋은 예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12) 그 전에 빌라도와 헤롯이 왜 원수지간이었느냐 하면, 헤롯은 이 나라의 왕이고, 빌라도는 침략군 쪽에서 온 총독입니다. 그렇기에 서로 사이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의 적을 만나는 바람에 둘은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그것이 양심의 찔림을 받는 일이었지만, 그 양심의 가책이 그를 주장하게 하지는 못 했습니다.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 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 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막15:6-15)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란, 얼마나 영적이거나 진리에 관하여 무디고 깨우침이 없는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빌라도에게 영적인 진리로 그 영혼과 양심을 두들겨도 그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변한 자들입니다. 우리 쪽에서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변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감사가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더 자극적인 것으로 감사의 조건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방언을 주십시오,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시오, 내 아들이 이번에 대학 시험에 수석을 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들로 신앙의 만족의 조건으로 삼는다면 아직 그 사람은 참으로 감격해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다함이 없는 감사의 삶은 십자가와 용서와 구원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십자가를 통과하며 죄인이라는 지적이 없이는 진정한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첫 번째 외침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전도 활동의 서두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음을 아는 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아는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베풀어 졌음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빌라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는 육신에 속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이 자리를 육신적으로 바라보면 엉뚱한 일에 기쁨을 삼고 허황된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은 구원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온전한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기쁨을 소유하신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빌라도의 질문에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 이뇨”라고 되물으신 주님의 의도와 빌라도가 가졌던 두 가지 의혹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 죄를 찾지 못하고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 준 빌라도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 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3.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아무리 좋은 씨가 뿌려져도 결실치 못한다는 것을 빌라도를 통해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5. 우리 신자들에게 진정한 감사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주님을 좇는 길이 어리석어 보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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