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도들로 말미암은 기사와 표적
본문 / 행 2:42-47
1. 새 시대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을 들으면 아마도 ‘다 아는 이야기를 또 하네’ 라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삼천 명씩, 오천 명씩 회개하였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는데 한 쪽에서는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일어나는 반면에, 우리는 ‘그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만 안 들었을 뿐이지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의 반응이 혹 우리 모습 가운데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가 원하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를 찾았다는 것에 대하여서만의 회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무너지는 회개가 바로 성령이 임하여 나온 회개인 것입니다. 그런 회개이기에 “나는 이제 망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할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는 탄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의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에 대어 죄가 사하여 지게하고 그 후에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한 것처럼, 지금 초대교회에 이와 같은 회개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성령을 보내사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여 그 백성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여도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죽였지만, 초대교회 베드로의 설교는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남으로 새로운 시대, 즉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천 명의 회개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일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 대해 관심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시대에 보여진 것이 회개만이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시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초대교회 모습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2:43)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베푼 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성령이 일하시는 표적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설교는 베드로가 했으되 설교를 들은 자들을 회개케 한 것은 성령이 하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들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사도들의 설교를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삼천 명이 회개하게 된 것 같이, 다른 사도들로 인해서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기사와 표적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기사와 표적’이라고 하면 불치병이 낫는 등의 신비스러운 일들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본문 43절에서 말하는 기사와 표적은 그 뒤에 이어지는 44절부터의 내용을 두고 한 말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고 합니다. 즉 물건을 통용하는 것, 재산을 나누는 것,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함께 음식을 먹는 것 등입니다. 우리는 신비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일상생활들을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염두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기사와 표적의 의미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사건이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사와 표적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시대가 어떤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서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자들에게 주는 것과 그러함에도 기쁨이 넘친 것입니다. 이것은 강요나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 자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거할 때에 그 땅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이기에 아무라도 사거나 팔거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사는 자가 어려움에 처하면 경작권은 팔수가 있지만 언제라도 되 물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능력이 없어도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르기’를 해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안 되면 하나님의 법에 희년이 되면 그 기업이 자동으로 원래 주인에게 돌아오게 하는 것을 법으로 제정하여 놓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제도는 부동산 투기가 결코 일어날 수 없게 하는 그래서 빈익빈 부익부가 일어나지 못하는 제도적 장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여 버리고 그 가운데서도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이스라엘 안에 발생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5장에 보면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사5:6-8)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땅에 심으신 것은 좋은 열매를 원하셨습니다. 공평과 의로움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나온 열매란 포학과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다 보니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포학에 시달려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12절에도 보면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사5:12)라고 합니다.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간 자들은 잔치를 하고 온갖 악기와 포도주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행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멸하여 버리신 가나안 사람들의 모습이며 바알을 섬기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어떻게 다스리는지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사 놓은 주식이나 부동산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시고 주의 자리에 앉히신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높아 지셨으니 이제 나에게도 좋은 자리 하나 달라고나 하는 삶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이 소식을 듣고서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서 성령을 보내셨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니 이제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로 계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와 심판주가 되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세상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려 왔는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내시는 주와 메시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법으로 제도를 만들어도 되지 않았던 경제적인 평등이 이제 누가 강요하고 의무 규정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자기의 재산을 교회 공동체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니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전에는 자기의 재물이 자기의 것인 줄 알고 악착같이 끌어 모았습니다. 그 재물이 자신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리고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돈이란 가히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는 선포 앞에서 회개하고 자기의 재물을 조금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들이 억지나, 마지못해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자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참으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 이런 일들은 기쁨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고 또한 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3. 참 자유
문제는 오늘날 초대교회를 본 받자거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목회자들에게는 이런 부분이 참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은 괜찮은데 또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 역시 교회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가진 것이 있는 자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재산을 팔아서 나눌 것을 강요하거나 명령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기사와 표적은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인데 오늘 본문 역시 오늘날의 교회가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주어졌다기보다는 장차 미래에 주어질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미래를 지향하며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서 자연히 그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레위기 25장에 보면 희년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희년이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희년에는 종이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산 땅을 다시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고 합니다. 이것이 곧 레위기에서 말하는 희년 사상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누가는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 말할 때 누가복음의 희년 사상과 사도행전의 본문 내용이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서 자유를 전파하게 하셨다면,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초대교회가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는 육신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붙들린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자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잘 아는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왔을 때 예수님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좇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자기 소유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소유에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영생을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좇지 않았다면 결국 그 청년은 자기 소유에 붙들려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시작하시고, 교회를 통해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곧 완벽한 자유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나라 그리고 그 모습이 현세에서 보여지는 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향하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증거 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시작된 초대교회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기사와 표적으로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 교회는 모여서 교회 발전을 목표로 삼고 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게 하셨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초대교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삶으로 인해서 되어 진 열매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역시 교회로 모이면서 과연 내게서 보여 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성령이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들의 목표를 가지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서 모이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성령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지 우리들이 스스로 교회의 목표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원하는 일이 곧 우리들의 목표와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보여주는 싶은 것은 큰 예배당과 많은 교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 애쓰는 교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는 분란과 다툼도 있고 경쟁도 있습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신자가 준비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흔적이 우리의 삶에서 보여 지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배워가면서 자유자의 신앙이 보여 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 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아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그런 하나님의 뜻만 선포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령으로 인한 회개와 그리고 그 방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사도들로 말미암은 기사와 표적을 무엇이라고 설명하였습니까?
4.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모습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초대교회에 나타난 모습을 통하여 오늘날 교회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시려는 것입니까?
6.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성령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목적과 오늘날 우리가 교회로 모인 목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