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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빌라도와 같은 판결을 하며 사는 우리

본문 /  요19: 1-22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판결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는 내용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악의에 찬 계획들을 밀어 붙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여럿 세웠으나 마땅한 죄목이 나타나지 않던 차에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며 마지막 날에 권능의 보좌 우편에 계실 것과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는 말에 참람죄라는 죄목을 걸었고 빌라도를 밀어붙여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도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이 로마에 위협을 주는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민란이 일어나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이 같은 외적인 요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복음서의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오늘 깊이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십자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에 대한 무죄 증언과 유죄 증언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그 중에 유죄 증언은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23:2) 여기서 세 가지 죄목을 겁니다. 백성을 미혹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 빠지게 했다는 것과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를 바치지 말라고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칭왕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로마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사형을 언도하도록 하게 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모함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같은 죄목들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는 죄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했다면 유데 민족들에게는 애국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점은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니까 빌라도를 화나게 하기 위한 죄목들을 억지로 갖다 끌어 모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27장에 있는 유다의 뉘우침입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3-4)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았던 유다가 그 문제에 대해 후회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빌라도 아내의 무죄 증언도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마27:19)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남편인 빌라도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정들의 증언도 나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27:54) 다시 말해 예수님께 걸었던 어떠한 죄목도 죄목으로 걸만한 것이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는 것은 세상 권력에 굴복 당하셨기 때문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잡혀 가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증언해 주셨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5-36) 마태복음 26장에 가면 이것보다 더 구체적인 예수님의 증언이 나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1-54)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낼 수 있다고 할 때의 ‘영’이라는 것은 지금 식으로 하면 사단 규모 정도의 병력을 말합니다. 로마군 편재의 영은 3천명 내지 6천명의 군대 수를 가지는 편제입니다. 오늘날의 사단 병력은 2만 명 정도가 되지만 당시의 영이라고 하면 인구가 많지 않았던 시대였으므로 오늘날의 사단 병력에 해당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12사단도 더 되는 천군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이 목적하는 바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비록 사람들의 손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의 권력과 힘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할 때마다 마치 하나의 신파조를 연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저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빌라도 그리고 로마 군병들이 우리 예수님을 못 박다니.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 주님을 죽이려면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하면서 막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배경으로 흘리는 눈물이라면 경계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그런 열정을 갖고 예수님의 일을 가로막고 섰다가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엄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이 악하고 세상 권력이 흉폭 해서라기보다도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채찍질을 받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은 빌라도와 로마 군병들과 유대 관원들의 일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였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사실을 놓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절반 이상은 그 빛이 바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려고 많은 애를 씁니다. 그러나 놓아주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빌라도가 양심이 없고 줏대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를 원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십자가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내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자비인 십자가 사건을 우리가 단지 눈물과 감정과 감격으로써 비빔밥을 만들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 앞에서 눈물만 흘리는 것으로 다 왔다고 생각하기에 우리의 신앙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큰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눈물만 흘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훨씬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당시의 상황과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의 죄 값을 치르실 것을 예언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2. 베드로의 설교

그러면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과 감격의 감정으로 가는 것과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이 요구하는 쪽으로 오는 것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전자는 눈물 흘려 울고 나면 시원한 것이 되겠지만, 성경이 요구하는 쪽으로 오게 되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긴장이 된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를 믿는 곳에 다 같이 와서 울어서 때우는 것으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실에 대해 눈을 뜨고 그렇게 되고야말 역사의 결론에 대해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변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철저히 셈하고 계산하고야 마는 역사의 분명한 결과를 직시해야 된다는 교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울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고, 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과 내가 그분 앞에서 내가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을 직고하며 심판 받을 것을 엄숙하게 확인하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헌금이나 내고 한 시간 동안 감동한 얼굴을 하고 돌아가서는 ‘하나님께 나도 해드릴 만큼은 했습니다. 그러니 이 한 주간도 하나님도 양심이 있으시다면 보호해 주시겠지’ 라는 식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사건은 가장 무서운 기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하면 쉽게 감동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언행 속에는 얼마나 십자가에 감동 했는가 라는 차원에서만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제자들의 언행들이 십자가 사건이 사실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담대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설교는 감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대개 베드로의 설교 하면 삼천 명씩이나 회개하였다는 결과 때문에 벌써 감격하여 들어갑니다. 또한 스데반의 설교는 스데반이 예수님을 보고 그 얼굴이 빛난 천사같이 되어서 죽으면서도 웃으면서 죽은 감동 속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설교는 그러한 시각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22-36) 모두가 사실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결코 상대방에게 아부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을 감동시킬 목적으로 이 설교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전적이고 은근한 책망조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들은 자들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답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항복하고 투항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틀렸고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슨 ‘주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눈을 감으시고 주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자는 손을 드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의 요구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방법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녹이는 방법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그런 식으로 복음까지도 감정적인 드라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고,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입니다. 이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큽니다. 세상의 어떤 슬픈 드라마보다도 더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어떤 응석을 부려도 좋고 그저 울기만 하면 모든 것이 되는 식으로 넘겨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서운 현실이요, 철저한 보응을 보여주는 놀라운 대목입니다. 이제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좀 더 엄격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스데반의 설교

사도행전 7장입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하니라"(행7:2-53)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 중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입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이 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두며 그들이 살 곳을 준비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선택하여 세운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괄시를 받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고향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어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괄시를 받으면서 이스라엘의 초석을 놓았던 자였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가족인 이스라엘을 먹여 살리고 유지할 준비로 먼저 보내어졌던 일이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적의 나라 바로의 궁에서 키워졌고 모든 학문과 지식을 겸비한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졌지만,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먼저 요청한 적이 없었으며, 모세가 앞장서서 한 일에 대해서도 만족하고 감사한 적이 없었습니다. 스데반의 이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지적하려는 것은, 너희들이 옳다 아니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모두 ‘옳다'고 하면서 항복하던 자들이 아니라, 조상 적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알고 감사하며 순종한 적이 없이 항상 불순종을 일삼던 자들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종의 자식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취소하시거나 변경하신 적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요셉을 보내시고, 모세를 보내시고 또 다윗과 솔로몬을 보내어 성전을 지은 것같이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도 보내셨고 그 예수님을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게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지나간 과거이므로 아브라함도, 요셉도, 모세도 알고, 다윗도 압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거부하고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를 원했던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원함과 원하지 않음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긍휼과 은혜를 따라 종들을 세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았지만 보내셨고 하셔야 할 일을 다 완성하시고 지금은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든 거부하든 간에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순종과 패역과는 상관없이 이루시고자 하신 일을 이루시고 완성하시고 마신 것입니다. 이제는 그의 나라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4:1)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성경이 무슨 요구를 할 때마다 앞에 붙는 서론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장난일 뿐입니다. 우리가 늘 생활 속에서 넘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완악함일 것입니다. ‘주님, 이것이 사실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주를 사랑합니다' 하면서도 우리는 죄악에 넘어지고 반역의 길에 섭니다.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에게는 죽일만한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영원한 나라가 있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로마 황제가 무섭고, 자기가 지금 앉아 있는 총독의 자리가 더 보배롭기에 예수님을 죽이는데 내어주고 말았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이 더 커 보이는 눈과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바로 직시하십니다. 그같이 완악한 나를 위한 십자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젠 신자다워 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존엄한 신자의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더럽고 게으른 자리와 미련한 자리에서 뛰쳐나오십시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지적하는 무서운 지적입니다. 이 지적 앞에 나 자신을 확인하고 점검하시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존귀한 그 자리에 합당한 자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을 모함하는 거짓 증언이 이스라엘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죄목으로 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이 힘으로는 12영이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음에도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십자가 하면 생각나는 내용과 성경이 요구하는 내용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4.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5. 스데반이 설교를 통해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를 등장시켜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지 않으려면 가져야 할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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