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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무지한 이스라엘의 신앙

본문 / 19:14-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은 그들을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물론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왕과 백성의 관계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다르게는 아버지와 자녀, 남편과 신부 등의 관계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 우리의 왕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시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만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통신앙인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의 무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율법문제로 인해 많은 시비를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으로 인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시비를 받았고, 음식을 먹을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것으로 인해 정결 문제에 대해 시비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요한복음 9장에는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요9:16)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부인하였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 믿음의 기준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였고 그렇게 신앙의 척도인 율법도 지키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로서 온 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 하심으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완전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완전한 율법을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한 것으로 완성시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이해로부터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허물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고 하십니다. 이처럼 죄악 된 인간이 율법이 요구하는 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로는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열성과 믿음과 의지로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들을 의로운 존재로 여겼던 것이고,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한 하나님의 백성 됨은 의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말씀의 완전의 의미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이 무엇인가를 증거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율법을 소중히 여기고 잘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율법이 오히려 무너지고 잘못 오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렇다면 결국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 규례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고 안하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우리도 가만히 보면 신앙의 많은 부분들이 옛날 유대인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참된 것을 찾아가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참된 것으로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진리를 찾아가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14절에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날이 유월절 예비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 예비일에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소경이었던가를 말해줍니다. 유대인에게 유월절은 아주 중요한 절기입니다. 31절에도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안식일은 유월절의 안식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데 십자가의 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해서 믿는 자는 생명에, 믿지 않는 자는 사망에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유월절은 바로 이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과 바르지 않은 집으로 구분하여 피를 바른 집은 살리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생명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유월절이고 신약의 십자가 역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유월절 예비일에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월절에 대한 유대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유월절

그러면 이들은 유월절에 대해 어떤 오해를 했는가를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출12:21-25) 여기 보면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어느 한 날을 지킬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규례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즉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영영히 규례로 삼아야 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가 산 것은 어린양의 피 때문이다’는 것을 영영히 잊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는 것을 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월절이라는 날을 크게 여기고 유월절의 어린양은 무시해버렸습니다. 즉 그들은 유월절이라는 절기만 지키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참된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죽여서 자신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월절 예비일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큰 날로 여기고 그 날을 지킨다고 해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어린양의 피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피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피를 본다면 자신의 죄에 애통해 하면서, 결코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큰 날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유월절에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없이도 얼마든지 어린양을 잡고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없이도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던 그들처럼 예수님이 없이도 예배가 가능한 건 아닌가 점검하셔야 합니다. 결코 날을 정하여 모이고 기도하고 예배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유대인처럼 어린양의 피의 의미가 사라진 채 모양과 형식만 남아 있는 빈 껍질의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어린양의 피를 바라보는 신자는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은혜의 열매로 여길 뿐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방해하는 우리의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유대인처럼 ‘나는 이것을 행하고 이것을 지키고 있으니 저 사람보다 믿음이 좋다’라고 여기는 자기 의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적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의를 잊어버리게 하는 가장 큰 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대적과 날마다 잘 싸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승리는 예수님의 피에 있음을 믿으며 예수님께 감사하고 사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은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자신을 보는 것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며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 왕이신 하나님

그런 유대인들이기에 힘없이 잡히신 예수님의 모습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왕과는 전혀 다르기에 그런 왕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이 땅의 모든 자들이 얼마나 조롱하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 왕이 쓰는 면류관 대신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왕의 붉은 옷을 입히고, 왕의 홀을 갈대로 대신하여 들게 하고서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하고서 놀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주먹으로 치고, 눈을 가려 때리고, 침을 뱉으며 네가 선지자라면 알아맞혀 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에 우리는 감상적이기 쉽지만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을 지금 누가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기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군병들이 합동으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일을 진행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9장입니다. “빌라도가 가로되~~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요19:10-11) 빌라도가 자신이 예수님을 놓아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지금 네가 나를 이렇게 심문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는 것은 다 위에서 허락하셨기에 되는 것이지 네가 권세가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잡히심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진행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하면 그저 예수님이 고통을 생각하며 감상적이 되어서는 눈물 짜내고 있지만 성경은 지금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누가 끌어가고 계시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거기에 동원된 유다나 로마 군병이나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들의 악이 어느 정도 인가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0장에 보면 악한 포도원의 품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이 종들을 보냈는데 두 번이나 때리고 죽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는데도 그 아들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상속자가 없어지니 자신들이 영원히 주와 왕으로 살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결국이 스스로가 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왕 됨을 위하여 결국 하늘의 왕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8장입니다.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8:4-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믿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다른 나라들을 보니 왕의 말 한마디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들도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사무엘에게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나님께 아뢰니 하나님께서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하면서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 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하는 것도 주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의 왕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생사여부를 쥐고 있는 왕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며 버린 그 모퉁이 돌이 우리의 왕이신지 아니면 세상의 권세를 쥐고 있는 가이사 같은 자가 우리의 왕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에 넘겨주지 않도록 애를 쓰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의 소리가 이깁니다.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대제사장들이 대답하대 가이사 외에는 우리의 왕이 없나이다”(요19:12-16)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왕은 가이사 외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왕은 언제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이사 외에는 우리의 왕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하면서 유일하신 왕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의 진행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시면서 까지 인간들의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께서 진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심판임과 동시에 자기의 택하신 자들의 구원의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가이사의 충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까?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답으로 사는 삶이 바로 우리의 신앙임을 아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율법의 기준으로 받은 오해와 그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그 율법에 이스라엘이 가진 오해는 무엇입니까?

3.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라’는 말씀의 뜻과 그 말 씀에 대한 이스라엘의 오해는 무엇입니까?

4.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무엇입니까?

5.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6.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이시면서까지 보이시고자 했던 내용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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