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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 현장에서의 거룩한 음성

본문 /  요19:17-27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의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그 현장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우리의 귀를 대고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십자가 옆에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좌우편에 다른 두 사람도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누가복음에서는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39-43) 예수님의 좌우편에 두 행악자중 한 사람은 예수를 조롱하며 ‘네가 구원자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 보라’고 합니다. 함께 힘없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는 주제에 무슨 구원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우리는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이지만 이 분은 잘못한 것이 없다” 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당하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의 강도는 악한 강도이고, 예수님께 ‘저를 생각하여 주소서’ 한 강도는 착한 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같이 사형당하는 주제에 무슨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늘 큰 죄 작은 죄를 구별합니다. 더 착하냐, 아니냐로 구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큰 죄의 삯만 사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크던 작던 심지어 마음속에 있는 죄까지 모두가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둘 다 같은 강도입니다. 바로 이 두 강도가 모든 인류의 모습인 것입니다. 모두 누가 더 잘났는가 하고 살지만 우리의 실상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사형에 마땅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편은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하고, 한편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 커다란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 줄만한 그런 모습과 사건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편 강도는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가복음에서는 강도 둘 다 욕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16:32) 두 강도가 처음에는 함께 욕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한편의 강도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자를 보고서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신과 동일하게 고통 중에 죽어가는 자를 보고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죄가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을 그의 나라가 임할 때에 생각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오늘 어디에 속하여 있다고 보십니까? 구원받은 강도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욕하고 있는 강도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구원받은 강도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나는 나의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한편 강도처럼 ‘난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마치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하는 강도처럼 늘 예수님이 왜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아니하는가 하고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으시고,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면서 왜 내 형편이 이 모양이냐 하는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한번 멋있게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라고 큰소리 치고 싶은데 또 그렇게 나를 사용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 왔는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보니 자신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시고 자기 옷도 하나 챙기지 못하시고 벌거벗고 죽임당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여 모였습니까? 아직도 한편 강도의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면 예수님을 욕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면 죄로 인하여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어야 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강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 나오고,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제대로 인식하신다면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 위에선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밑에선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가지려고 합니다. 겉옷은 네 조각으로 나눠 가졌는데, 속옷은 통으로 짠 옷이라 제비뽑아 가지려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일에 대해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절)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일에 대해 미리 예언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배후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편의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22:18)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곧 구약시대부터 예언된 메시아임이 증명되었다는 뜻이고, 예수님은 성경에 계시된 모습 그대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장차오실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절)라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은 온 세상이 흠모하고 영웅으로 대접할만한 인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사야가 예언한 모습과는 달리 영웅이며 자신들이 흠모할 만한 위대한 모습의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유대인들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시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는 예수님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시편 22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생각 밖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어려움에서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고 외면해 버리신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하나님은 자신을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처럼 대하셨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는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상함 받고 질고를 당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상함을 받지 않고 질고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상함을 받게도 하시고 질고를 당하게도 하신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런 하나님은 거부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우리의 생각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계시한 그 모습 그대로의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역시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모습들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지금까지의 생각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한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엔 실제로 다윗의 옷을 벗기고 나누고 제비뽑아 가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에게 그런 일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고난과 어려움에서 돕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독생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십자가는 부지런히 말하되 십자가의 삶을 살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멸시를 받고 죽으시는 고통과 어려움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야기 하지만 결국 우리는 죽음은 회피하고 부활만 소유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뒤에 영광을 받으셨음에도 우리는 고난은 싫고 영광만 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고, 고난 없는 영광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잘 믿으면 예수님이 자신을 그냥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우리를 특별 대우하여 세상에서 높여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기 전이나 후나 사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신앙이 있음으로 해서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되고, 세상을 심판받을 땅으로 바라보게 되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절실히 원하는 자로 살아가는 존재로 달라지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환경이나 형편이 아니라 우리의 속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갖고 멸시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냥 침묵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도 받으셨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 나서시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억울함을 당하고 어려움에 빠짐으로서 도와달라고 부르짖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냥 침묵하시고 도와주시는 흔적이 전혀 없다면 아마도 우리의 마음엔 ‘신앙이 뭔가’ 하는 실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볼 때 침묵으로 보일 뿐,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가 부르짖고 애원을 해도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침묵하시는 것으로, 마치 아예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이 우리를 돕고 복주는 것으로 행하여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들에게 득이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소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지는 성공과 재물에서 하나님을 보려고 할 뿐입니다. 이들은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말씀 안에는 이들이 원하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적과 세상의 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들을 죽이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필히 십자가의 현장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군병들에게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게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에게 득이 되는 사건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현장에도 계시는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돌아보시지 않으시고,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장 초라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만이 우리를 생명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3. 요한에게.

오늘 본문의 십자가의 현장에 예수님의 제자 요한도 와 있는데 예수님께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미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집에 모시니라”(26-27) 마리아에게 요한을 아들이라 하시고,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가정이 된 것입니다. 혈통적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가족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로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그런 새 가정이 성립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심으로 원치 않는 멍에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한에게 지게 하신 멍에가 요한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진 자입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요한과 야고보의 불같은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격을 가진 요한에게 이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모시라고 합니다. 요한은 그때로부터 마리아를 모시면서 자기 성질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질대로 하였다면 아마 제일 먼저 순교할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 제일 첫 번째 순교자도 ‘우뢰의 아들’ 중의 한명인 야고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불같은 성격을 가진 요한은 마리아를 모셔야 하니 결국 제일 오래 산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서신서인 요한 일, 이, 삼서에 보면 이단은 그 발걸음도 들여 놓지 못하게 하는 엄격함도 있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뢰의 아들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한 것을 통해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요한은 십자가 밑에서 자신의 이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멍에를 메게 되었지만 주님이 지게 하신 그 원치 않는 멍에가 오히려 자신을 살리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밑의 우리, 어찌 보면 강도처럼, 군병들처럼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따라 살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우리가 원치 않는 멍에, 즉 십자가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우리는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 현장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현장의 모습 가운데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 자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달은 한편 강도여야 하며, 자신의 유익만을 기대하고 옷을 나누고 있는 군병들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서 원치 않는 멍에인 십자가를 부탁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지고 변화되어질 것입니다. 침묵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고 더욱 더 변화되어 살아가는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어느 편 강도인가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2. 예수님의 옷이 십자가 밑에서 나눠지는 일로 인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3.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예수님을 믿고 달라지는 것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6. 마리아를 맡은 요한의 변화가 우리의 신앙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습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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