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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경을 이루심으로 만든 구원의 근거

본문 / 요19:31-37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영혼이 돌아가신 이후의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서 죽으셨는데 죽으신 몸으로 또 이루어내실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인데 예수님은 죽으신 그 주검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주님의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그 죽으신 몸에 이루어지는 일과 장사지냄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오심과 재림까지 다 포함된 이루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먼저 죽으신 이후의 십자가에서의 일을 살펴보고 나서 다 이루심의 의미를 다시 사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뼈를 꺾지 않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금요일이고 그 다음 날은 안식일인 토요일인데 이 안식일은 큰 날이라고 합니다. 보통 안식일보다 큰 날이 되는 것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무교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안식일도 아니고 큰 안식일인데 그 날에 십자가 그것도 저주받아서 죽은 자의 시체가 나무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기에 자기들의 큰 안식일을 기분 좋게 지키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자들을 그대로 두지 말고 빨리 죽이자는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형이란 십자가에 못을 박아 달아놓고서 말려 죽이는 것으로 때로는 며칠씩 가는 것이 십자가의 처형 방법입니다. 그런데 금요일 못 박았는데 내일 큰 안식일이니 시체를 빨리 치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살아 있는 예수님 좌우편의 강도는 다리를 꺾어 죽이고 예수님께는 가보니 이미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지 않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는데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으니라”(요19:36-37) 예수님의 이런 죽으심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시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대로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분명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자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리를 꺾이지 않게 하시고 대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게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듣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먼저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내용은 시편 34편에 있습니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34:20) 과연 하나님은 이 말씀을 예수님에게 이루심으로써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시편 34편의 전체 내용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건지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20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뼈를 보호하는 자는 의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국 군병들이 예수님의 다리만을 꺾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뼈를 보호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이 시편 34편의 내용을 배경으로 보면 결국 예수님은 ‘의인’이라는 답을 내리게 됩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서 죽였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오직 예수님 한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9장입니다.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9:12)고 말씀합니다. 유월절에 희생 제물을 먹을 때 뼈는 꺾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 역시 시편 34편을 배경으로 해서 생각해 보면 희생 제물이 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의 뼈를 보호하심으로써 유대인이 죽인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오신 의로우신 분임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 찌른 자를 보리라

성경을 응하게 하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입니다. 스가랴서 12장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면 그 나타나는 현상이 내가 찌른 그 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위해 애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면 신앙에 열심이 생겨서 교회 일에 더욱 부지런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찌른 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으로 나의 죄로 인해 죽으신 그분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찌른 자가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부어졌기 때문이며, 내 죄를 알게 되고 애통하게 되는 것 역시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게 하심으로써 지금 죽으신 예수님이 죄인 된 자를 위해 보내신 의인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게 하신 것은 바로 너희가 의인을 찌른 자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간구하는 심령을 받은 신자라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구할 뿐입니다. 시편 51편입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51:8)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지은 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전체가 죄에 대한 자복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회개를 보면 단지 ‘하나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는 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회개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무작정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만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죄를 용서 받는 것이 목적이기 보다는 죄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8절의 내용 중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입니다. 뼈를 꺾는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뼈를 꺾는 것처럼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죄와 연관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이며, 죄와 연관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제물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이 죽이시는 제물의 희생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해달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물의 희생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희생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에 대한 기쁨이고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물에 대해서는 자신의 죄로 인해 희생을 당한 것에 대한 애통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다리를 꺾는 일도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며,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발견하며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죄로 인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리를 꺾도록 놔두는 것이 옳은데 왜 꺾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죄인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의인으로 죽으셨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도록 하셨습니다. 찌른 자를 본다는 것은 내 죄를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곧 예수님을 찌른 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음 받은 심령을 가진 신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다니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찌른 자를 보지 못합니다. 설사 본다고 해도 전혀 잘못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에 시비를 걸고, 교회를 다니지 않고, 교회 일에 등한시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찌른 자로 보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만 찌른 자로 보게 되면 결국 교회 생활 잘하는 나는 예수님을 찌른 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찌른 자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스가랴서 12장 10절의 말씀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부은바 된 심령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감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 동요와 분위기에 의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죄에 대해 애통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애통함은 나의 죄로 인해 의인이신 예수님이 죽으셨음에 대한 신자의 반응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애통함이 있는 신자는 예수님의 희생에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또한 기뻐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찾으며 세상의 것을 구한다면 그는 자기의 죄도, 예수님의 죽으심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도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자의 구원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그 어떤 조건도 구원의 근거에 끼어 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나를 더욱 사랑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처럼 성경을 무시한 착각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 덕분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린 다만 예수님을 찌른 자에 불과합니다. 죄인이 의인을 찌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인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찔렀음을 보지 않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로서 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주어진 이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지 마시고 날마다 누리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기 행동의 무게를 달아보면서 구원을 염려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음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3. 다 이루심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의 모습은, 십자가를 부적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차 뒤에 물고기 모양을 달고 다니면 사고가 안 나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면 별 일이 안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십자가에 날마다 나를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서 죽으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세상에서 더 잘 살고, 더 잘 나가기 위해 믿으려고 하니 어찌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과 함께 길르앗 라못, 즉 아람나라를 치기위해 하나님께 물어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선지자 400명이 나와서 ‘아합 왕이시여 올라가서 싸우소서 그러면 이길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하니 한 사람 있기는 한데 그 자는 늘 흉한 일만 이야기 하여서 미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빈말이라도 칭찬하여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쁘지도 않는데 예쁘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하는 것보다 얼굴 좋아 보인다고 하면 ‘뭘 그래’ 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만 하면 저주니 심판이니 재앙이니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왕에게 좋게 말하는 400명의 선지자에게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가서 그렇게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신이야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전쟁에 이긴다고 응답받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거짓말하는 영에 의하여 나온 대답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든지 이렇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것이 거짓말하는 영에 의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사욕을 좇아 자기 귀를 즐겁게 하려고 거짓 스승을 많이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듣고서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이 찔러 죽인 자가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애통이겠습니까? 독자가 죽고 장자가 죽은 것처럼 애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해 이런 애통이 나와야 합니다.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내 죄로 인함이라는 애통함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애통함이 있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약의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뼈가 꺾이지 않는 것과 예수님께서 찔림을 당하시는 것까지 모두가 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9장입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1-7)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자들에게 그 흑암과 사망의 권세를 십자가로 물리치시고 빛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위해 한 아기가 나와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은 결국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모든 성경에 나타나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결과로 오늘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알기에, 우리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삶이 우리에게 있음을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그 다 이루심과 그 능력을 더욱 더 알아 가시어서 주님의 이루심으로 더욱 더 세워져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는 무슨 내용까지 포함된 것입니까?

2. 좌우편의 강도는 뼈를 꺾어 죽였지만 예수님은 이미 죽으셔서 뼈를 꺾지 않으셨다는 의미는 무 엇입니까?

3.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해 애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4.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와 우리 생각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의 차이 는 무엇입니까?

6.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알면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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