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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주노니

본문 / 행전 3: 1-10

 

 

1. 증거의 책

오늘 우리 앞에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나 신약의 바울 사도가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들에게 병 고침이나 또는 우리에게 득이 되는 어떤 일을 행해줄 것을 구한다면 과연 그들은 우리의 기대에 걸맞게 이루어 주기 위해 힘 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그들을 볼 때 그들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 아니며 또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존재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리스도에게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요 존재이유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세상은 돈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 받기 힘든 곳이기에 사람들마다 돈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들의 위대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적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적의 사건을 말씀드릴 때마다 강조 드린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적을 행한 사람이나 이적의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적을 행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나도 능력을 받아서 저런 이적을 한번 행해 봤으면'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고 또 이적의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나에게도 저런 이적이 일어나서 병도 고쳐지고 돈방석에도 앉아 봤으면'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우리가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면 어떤 이적의 사건에서도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경에 대한 바른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예수를 증거 하게 되면 그것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우상 예수를 증거 하게 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나는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를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한 부자 관원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계명을 말씀하시게 되고,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네게 부족한 것 한 가지가 있다고 하시면서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부자는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자입니다. 그러니 이제 돈은 가질 만큼 가졌으니 이제 종교적으로 영생이라고 하는 것도 챙겨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질문이 영생을 위하여 무엇을 하면 됩니까?’인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부자인 이 사람에게는 영생까지도 자기의 또 다른 소유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니 종교적인 넉넉함까지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무너지고, 자기가 챙기고자 했던 영생 앞에서 돌아서고야 만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8:24-25)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지 부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있는 자는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재물이 있는 자란 단지 돈 많은 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가 있는 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재물도 또 영생도 자기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여기는 자기 생각이 가득한 자, 즉 자기 소유가 많은 자는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도 영생도 우리가 만든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로 맡기시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맡기시고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또 세상에서 가치 없이 보여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름답고 존귀한 것임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혹 우리도 이 부자 관원처럼 영생까지도 마치 취미 생활이나 여가생활 같은 것 중의 하나로 여기며 내 것으로 챙기고자 하여 주 앞에 서는 자들은 아닌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구하려고 주 앞에 서 있는 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혹 세상에서의 우리의 득을 위한 것이라면 이제 그것을 내려놓고 주를 좇을 수 있는 믿음으로 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나사렛 예수의 이름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두게 하는 분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고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대하면서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말하면 뭔가 되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마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일종의 주문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이 다가와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외치면 죄를 이기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결코 그러한 용도로 쓰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아무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를 외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뭔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단어에는 그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두 사도가 나사렛 예수를 말씀하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이 일하는 모든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존재할 뿐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6절의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성전 문에서 만난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은 날마다 미문(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아마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을 만나서 구걸을 하면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입장에서 거절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주일에 예배하러 갈 때에 뭔가 좋은 일을 하면 왠지 복을 받을 것 같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쨌든 앉은뱅이는 평소대로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합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 말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여기 사도들에게 없는 것은 은과 금이고, 반대로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 세상이 요구하며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은과 금이지만 성령이 임한 자의 요구는 그런 은과 금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 한 가지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없어도 되는 것은 그렇게 찾고 구하면서 정작 있어야 하는 것은 구하지도 찾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려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앉은뱅이의 처지를 본다면 본문 2절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3:2)는 말씀과 같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이거나 살아갈 수 없는 처지이고, 구걸을 하는 것조차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할 수 있는 자입니다. 돈이 필요할 때도 스스로 나가지 못하고 누군가가 성전 문에 데려다 주기를 애타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그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하고 무능한 처지에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의 처지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앉은뱅이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처지를 발견할 수 있고 또 스스로 그렇게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생명의 뿌리를 내리며 또 우리는 참으로 희망이 있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앉은뱅이는 우리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스스로 돈을 벌며 살아간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돈에 대해서는 우리는 앉은뱅이와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는 죽은 자요 무능한 자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처럼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일이 우리 안에 시작되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앉은뱅이에게서 우리 자신의 처지를 볼 수 있다면 오늘 본문 6절의 베드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돈을 구합니다. 앉은뱅이 된 그 사람에게 필요로 한 것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앉은뱅이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일어나 걷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를 일으켜 걸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면 그는 분명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바라봅니다. 아마 그는 분명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는 말은 앞서 말한 대로 단순히 돈이 없다는 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돈 대신에 병 고침을 주는 결과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기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행하는 일이 은과 금, 즉 세상의 재물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으로 되어지지 않는 일을 한다는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 어느 누구라도 은과 금이 많아서 그것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그에게 준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앉은뱅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는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앉은뱅이라는 질고를 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고 말한 것은 너의 그 질고는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찬미 예수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 앉은뱅이가 고침 받은 것은 단순한 병 고침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8:17)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예수님의 병 고침은 곧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의 베드로의 말은 단순한 주문형식의 말이 아니라 연약하고 무능한 너를 일으켜 세울 분은 오직 너의 모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복음의 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난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능력을 행하시자 사람들은 귀신의 힘을 입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같은 나라끼리 싸우겠느냐 그러면 그 나라가 망하리라고 하시며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한 모습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 승천하셔서 자기의 사도들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고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믿음입니다. 나에게 금과 은은 없습니다. 지식과 명예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지 나사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있는 것은 주 예수의 이름입니다. 나는 이것으로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이 예수의 이름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생명의 나라로 옮기신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 안에 생명과 지혜와 지식과 영생의 기업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가진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가 곧 우리의 처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에 대해서는 스스로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담당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걷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내 힘으로 내 스스로 걷고 뛰는 것으로 착각함으로 인해 우리들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사라지고 대신 우리 자신에 대한 자랑이 나오게 됩니다. 일어난 앉은뱅이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앉은뱅이의 처지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생명을 얻었고,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것뿐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단지 말로만이 아닌 우리가 어디 있든 또 누구를 만나든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은 그 은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베드로에게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또 오늘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분이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얻은 우리라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앉은뱅이가 모인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인 것입니다. 예원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의 능력의 사람들이 우리 원함대로 일하지 않는 까닭과 또 그것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성경의 이적의 사건을 대할 때마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예수님과 부자 관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이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이해와 그 이름을 말한 사도들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사도들에게 잇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6.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가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은과 금을 요구하는 앉은뱅이에게 예수의 이름을 준 의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8. 우리가 앉은뱅이 된 우리의 처지를 망각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며, 반대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주 안에서의 일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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