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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참 부활 신앙을 가진 자의 삶

본문 / 요20: 1-10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이미 신앙생활을 해 오시면서 많이 들었던 것이고 또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또 믿고 있다고 자부하기에 식상한 내용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대해서는 아무 감각이 없고 도리어 911사태처럼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 테러에 의해 무너졌다고 하면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더 가야 당연한 것이지만 실상 보면 그렇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설교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대다수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이 무슨 위로가 되며 또 그게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졸음이 오고 그러다가 누가 어떻게 해서 복 받았다고 하는 간증이 나오면 졸음이 확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에 대한 확인이나 확신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부활의 내용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부활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부활 신앙이라 할 수 없고 그렇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관없는 부활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1. 믿더라

오늘 본문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은 무덤에서 옮겨져 있고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놀라 돌아와서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즉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마리아의 말대로 무덤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만 남아 있던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에서 대개 생각하는 것은 ‘부활의 확실성’일 것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기에 부활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한 내용이 아닙니다. 비어 있는 무덤 또한 부활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어떤 물증을 통해서 믿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물증을 가지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창조도 그렇고 노아 홍수도 그리고 자연을 초월한 수많은 기적들까지 어떤 물증으로 인해서 확신을 가지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빈 무덤을 보았다고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9절을 보면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무덤을 찾아온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가 들어가 보고 믿더라”(8절)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더라’는 단어의 의미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마리아가 무덤이 비었다고 알려준 것 때문에 무덤으로 온 것이니 결국 마리아의 말을 믿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9절의 내용이 부활에 대한 것임을 생각해 보면 이 ‘믿더라’는 말은 부활과 연관된 것임이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부활을 믿었는데 9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부활을 믿게 된 제자에게 부활을 알지 못하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활을 믿기는 하나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기 8절과 9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부활을 믿으면서도 아직 부활을 알지 못한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 우리 자신의 상태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하여 부활에 대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도 부활을 알지 못한 수준에 있는 것이 우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신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제자들이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성경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자기 신앙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 ‘믿더라’ 하고서는 ‘저희가 아직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빈 무덤을 보았고 그리고 세마포와 수건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시체를 옮겼다면 세마포 싸인 채로 가져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다시 살아 나셨는데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을 듣고도 무덤덤한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나중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요21:3-4) 도대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고도 나는 고기 잡으려 갈란다하고서 간 베드로와 거기에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선 자들이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에서라도 예수님 비슷한 분만 보아도 난리가 나는 판인데 여기 제자들은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도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면서 옛날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부활이고 내일 당장 먹고 사는 문제나 해결해야 하겠다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삼년 동안 따라 다니느라고 사업도 하지 못하였는데 다시 사업이나 하러 가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도 부활의 소식을 듣고 있으면서도 왜 다른 염려들이 더 많은 것입니까? 제자들이 메시아로 알고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영광, 즉 자기 민족의 영광스러운 회복이었습니다. 선민의식. 자민족 중심주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셔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40일을 땅에 계셨는데도 그것으로 무슨 큰일을 이루어 내시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실 때에는 기적을 얼마나 많이 행하였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 자신도 한자리 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게 수천 년을 기다리고 기다린 메시아의 왕국이 세워지리라는 기대로 따라 나섰는데 십자가에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여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기가 잡으러 가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하고서 묻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관심사도 오직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다 몰아내고 다윗의 왕국을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꿈꾸는 세상이었습니다. 참 부활의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제자들도 끊임없이 자기 신앙을 가지고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3. 부활신앙

그럼 참 부활의 신앙이 만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9절을 보면 성경 어딘가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사실 9절의 내용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6편입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이 말씀을 보면 9절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내용은 이미 죽은 자를 죽지 않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살린다는 뜻입니다. 이 시편 16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이 다시 살 것을 믿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유대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부활 한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즉 다윗이 부활을 믿었으니 우리도 부활을 믿자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다윗의 부활 신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룩한 존재 안에서의 신앙이었음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으면 부활한다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러니 비록 그들이 부활을 믿었다고는 하나 부활은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대개 예수님의 부활을 장차 부활할 우리들에게 미리 시범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날 봐라 내가 부활한 것처럼 너희도 부활할 것이다’는 식으로 미리 부활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부활을 믿기는 하나 부활을 알지 못한 유대인의 수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이 우리들을 단지 종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나처럼 하면 너희도 부활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너희는 결코 생명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너희는 결코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죽으심을 통해서는 우리가 곧 죽어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는 생명의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아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의 삶에 있다면 그것이 곧 부활을 믿지만 부활을 알지 못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한다”는 막연한 기대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생명이라는 굳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날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에 불이익이 올 수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라면 바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아는 자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다만 믿음만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입니다. 삶을 주님께 드리지도 못할뿐더러 주님을 위한 삶에서도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 없이, 주님을 위해 포기한 것 없이, 다만 자기 이익을 기대하며 주님을 추종하고 있는 수준일 뿐입니다. 부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자기 죽음이 없이 다만 다시 산다는 것이 좋아서 믿는 것이 전부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사람은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잘될 때는 좋아하며 주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잘 되지 않을 때는 예전의 은혜는 모두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을 채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중심의 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다스리는 결과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기에 자기 일이 안된다고 해서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찾기를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시범이 아닙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너희는 나에게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아는 자는 ‘나는 부활한다’가 전부가 아니라 ‘나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느 수준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한다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에는 힘이 없습니다. 부활은 놀라운 능력이며 힘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는 신자로서 힘이 없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으나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도 못한 채 믿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믿음도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제자들도 그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의 이스라엘의 회복을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런 것은 너희가 신경 쓸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만 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고 나니 제자들이 드디어 알아차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심이 아님을 알고서 이방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혈통중심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내시는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변화된 모습이며,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기 전에 과연 부활을 아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라는 것으로 부활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신앙은 우리들에게 큰 힘과 능력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고 내가 가진 가치관이 변화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은 예수님이 내 생명이라는 굳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떤 불이익 가운데서도 주를 향한 사랑과 믿음이 걷어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는 것이며 성경이 말씀하는 세상이 감당 못하는 자들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 매일 나그네와 같은 삶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고 의지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믿더라’라고 한 다음에 제자들에게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 슨 의믘입니까?

2.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㳴고도 물고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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