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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본문 /  요21:15-19


1. 베드로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서도 다시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처음 부름 받았을 때 두 배가 잠기도록 가득하도록 물고기를 잡은 현장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떠나가시라고 하였습니다. 물고기 많이 잡힌 기적을 보고서 이제 부자 되었다고 기분좋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 것이 참된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배와 잡은 고기와 그물과 집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3년을 따라 다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 자신도 능력을 받아서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배신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입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22:24-34) 누가복음 22장의 배경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는 내용으로서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세우시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지금 죽으시려고 가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땅은 높은 자가 주관하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인할지라고 근본적인 믿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인하지 않도록 기도하시면 되실 텐데 왜 부인하도록 허락하시고서는 다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베드로의 열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말로 용감하고 자신 있게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결코 사람의 일이 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심과 마음은 매 순간 순간마다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인간적인 그런 열심은 깨어져야 하며, 베드로의 자존심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모든 자들은 베드로처럼 깨어져야 하며, 그 자존심도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고,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역은 감당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나의 죽음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보면 베드로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입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 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행7:23-29) 모세는 40세 때 자기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애굽 감독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일로 말미암아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모세 자신의 생각과 계획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도망간 모세를 다시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지내고 자기의 힘과 능력이 다 빠지고 나서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집의 아름답고 충성된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자신의 열심과 능력들이 다 빠져 나가는 것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다시 부르시듯이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도 그렇게 부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고 다닐 때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울의 부르심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르느냐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능력 있게 일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도 원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가정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늘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오래 두시는가 하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오직 능력을 달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능력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크고 멋있게 그리고 원도 한도 없이 해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능력 행함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고 큰 능력을 행하였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하면 ‘너 죽으라’는 것입니다. 네 자존심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 있게 일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으로 일하는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십자가의 현장에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로 오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한 알의 썩는 밀알로서 오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는 자들의 능력이란 섬기는 것이 능력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능력인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자리는 자신의 자존심이 죽어야만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하심과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나오는 일들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의 힘과 땀과 수고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베드로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물으시는 것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보다, 라는 말씀은 각주에 보면 ‘이것들 보다’라고도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먼저 “이 사람들 보다”라고 보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아는 베드로는 늘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은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이지 다른 사람과 비교 경쟁하기 위해 물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말씀을 들은 후에 요한은 어떻게 되겠냐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만 하십니다. 그런 것에 네가 왜 신경 쓰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이것들 보다”라고 보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지금 베드로 앞에는 물고기 153마리가 잡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배도 있고 동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질문에 답하여야만 합니다. ‘너는 과연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는 질문에 답하여야 합니다. 둘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급입니다. ‘이것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자녀들보다 또는 은행의 예금이나 보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도 더 깨어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중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따랐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예 주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아직 출발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3. 주님만 사랑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 어떤 자세가 됩니까? 좌절과 낙심이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피상적으로 알 때에는 ‘예! 주님을 사랑 합니다’하고 말하였을지 모르지만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또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가를 말씀으로 확인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한 것이 주님을 죽인 결과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능력을 달라고 주님께 사람들이 몰려들다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세상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많은 무리들이 모두 돌변하여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친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모세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고난이 가중되니 모세를 벌하여 달라고 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와 나의 가정과 나의 회사와 나의 교회와 나의 국가와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발전시키고 영원토록 보존하여줄 그런 메시아를 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모든 것을 버리고 부정하고 자기 목숨마저 미워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을 과연 우리가 사랑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 같으면 아주 당당하게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 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세 번의 질문을 헬라어 단어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페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흔히 헬라어에서 사랑이란 육체적인 사랑을 위미하는 에로스, 가족이나 형제 그리고 친구들 간의 사랑을 말하는 필레오 그리고 신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는 아가페로 말합니다. 왜 그렇게 구분을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에 두 번은 아가페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계속 필레오로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는 필레오로 낮추어 물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면 ‘사랑하냐’고 물으시다가 마지막에는 그럼 ‘좋아하기라도 하냐’고 물으신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높이를 낮추어 주심을 은혜로 볼 수가 있지만 그러나 이미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결국 세 번이나 되물으심으로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려는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 나이다’에 대한 말씀으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처음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리라는 말씀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할지라도 주님은 또 다시 찾아 오셔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하고 부인하고 배신한 베드로를 사용하시는 것은 바로 자아를 깨어내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부수어 버리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을 통하여 주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나 모세나 바울의 경우처럼 그렇게 깨어진 자를 사용하심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는 자리는 참으로 처절하게 낮아진 자리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영광이나 우리의 자랑이나 능력을 드러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과 그 악함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이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의 당연한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에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아직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부수어 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만 항복하시도록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6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 아멘!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내게 찾아오시어서 물으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주님의 물음에 우리는 삶으로 답하셔야만 합니다. 여전히 주님만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로 살고 있는 것임을 알아 우리의 심령을 주 앞에 세워 속히 회복하시고 주님으로만 내 삶의 유일한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물고기를 잡는 현장에서 베드로에게 나타난 진정한 기적은 무엇입니까?

2.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시고도 그 부인을 막지 아니하신 예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3. 베드로, 모세 바울 등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입니까?

4.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을 좇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는 자리는 어떤 자리일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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