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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의 도와 우리의 자랑

본문 /  고전 1:18-25 


1. 하나님의 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우리들에게는 과연 없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면 일들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그런 의문이 드신 적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런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 모양으로 돌아가도록 방치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어떻게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많은 파벌이 생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계신다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 대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는 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4-39) 이 말씀은 평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으로 말미암은 신에 대한 개념과는 너무나 다른 말씀입니다. 나름대로 성경을 본다고 하는 우리가 보면서도 생소한 말씀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으로 보면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가정이 서로 화목하고 행복하게 된다고 해야 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전도하기 위해 만든 전도지 문구에도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같은 문구를 적어 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런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고 증거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슬쩍 빼버리고 나가야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보다 자기 가족이나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순전히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오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또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만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과연 우리가 목적하고 기대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목적과 같은 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삶과 같은 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2. 십자가의 도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십자가의 도라는 말씀이 있고 이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 보면 거리끼고 미련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들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시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자신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련하고 거리끼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을 ‘전도’라는 말씀 합니다. 미련한 십자가의 도로 구원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전도를 사람들이 잘 알아듣고 좋아하는 방법으로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십자가의 도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 입니다. 만약 구원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일하심으로만 되었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모르면 고린도 교회처럼 파벌이 생기고 자기 자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전도 방법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 수많은 전도방법에 대해 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기들의 방법이 옳고 또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방법이 미련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전도방법을 적용한 교회들이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들이 너무 많아서 다 말하기도 곤란할 정도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런 지혜로운 방법에 걸림돌이 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며,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해버린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지혜로는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십자가를 알고 믿게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이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멸망 받는 자들에게 십자가란 미련하게 보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십자가로서 두 편으로 나누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고서 미련하게 여기는 자들은 멸망 받는 자들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고 믿는 자는 구원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가는 로마시대의 사형형틀로서 로마를 반역한 자들을 잡아 죽이는 형틀인 것입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면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서는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한 짓으로 돌립니다. 민중들의 분노를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는데 처음에는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되게 하고, 두 번째는 십자가에 매달아 화형을 시킵니다. 바로 그런 십자가의 형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자 밥이 되고,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데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죽어 갈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음에도 사람들은 그 십자가 밑에서 자기 자신이나 구원해보라고 조롱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멸시와 핍박 가운데서도 힘없이 약하심으로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신명기 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받아 죽은 것이라고 하였기에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정말 저주받아 죽은 죽음일 뿐입니다. 메시아가 와서 강한 능력으로 자기 민족을 구원하여줄 표적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냥 십자가에서 달려죽은 것입니다. 도리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수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지만 정작 보여주시고자 하는 최종의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 삼일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땅속에 삼일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표적이 보여줄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미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1:19)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29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여 버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29장입니다.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29:9-16)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여 버리시는 이유는 인간들의 거짓됨과 교만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입술로만 존경하지 마음으로는 먼 것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이지 실상은 자기 자신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지은 자를 향하여 총명이 없다고 하는 이런 인간들의 교만을 인하여 인간의 지혜와 방법과 선행과 공로로는 그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도록 조치하신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자랑

그래서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0-21)고 하십니다. 세상의 지혜자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 즉 십자가의 도로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겐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2-23)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것은, 십자가란 능력이 아니라 실패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조차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돌아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능력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 왜 십자가를 지는 메시아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되는 것은, 헬라인들의 신의 개념으로는 신이 육체를 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다는 것 자체가 미련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삶의 원리란 인과율의 세계입니다. 자기의 행위를 자기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내가 선행을 하면 그 보상을 내가 받는 것이고 내가 악행을 하면 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원리가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보는 동화나 어른들의 민담들이 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선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자고 합니다. 그것이 윤리요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도 윤리와 도덕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이 서로 착하게 살도록 만드는 기능으로 보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신이 복을 주고 죽어서도 좋은 데 가고 나쁘게 살면 신이 벌을 주고 죽어서도 나쁜 데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당하기 직전에 예수님 믿었는데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강도가 천국을 간다는 것이 과연 이 세상 지혜로 될 말이겠느냐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율법을 지키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죄를 짓지 않고 살았던 바리새인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본 자손들은 빼앗기고 이방인들이 차지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아니 믿고는 사람의 지혜나 실력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 자체의 능력으로 인한 구원이지 인간이 십자가를 믿어주어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는 예수님이 하시고 그것을 믿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전도 방법들이 십자가를 진 것은 예수님이 하시고 믿는 것은 사람 편에서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구원에 있어서 자랑 할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를 알아듣지 못하였지만 나는 잘 알아들어서 구원받았다는 자기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이 문제는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신앙을 점검 해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는 것이 과연 은혜인가 나의 책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것은 처음 믿을 때 이야기고, 믿고 나서는 그래도 차이가 있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믿고 나서도 더욱 알아가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십자가를 알기 전에 나타난 열심과 헌신을 따라갈 자가 과연 있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 그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알고 난 이후에 나타난 바울의 열심과 헌신은 다른 것이 아닌 ‘나의 나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1:24) 임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입지 않고서는 믿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너보다 낫다는 자기 자랑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니, 나는 어느 파니, 하는 것이 나올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자랑이 나오고, 자기치장이 나온다는 것은 아직도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란 날이 가면 갈수록 그리스도만 자랑되어질 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이의 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에게 자랑이 있다면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내가 무슨 교회를 다니고, 우리 목사가 누구라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모르기에 나타나는 무지한 증상일 뿐입니다. 하나님만 자랑하십시오.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아 우리가 사는 모든 현장에는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뚝 서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성경에 기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2.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을 방법으로 구원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증상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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