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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 - 시각의 변화

본문 /  요16:16-22


오늘 본문에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으로 인해 제자들이 근심하자 예수님께서 설명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이루실 대속의 사역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6장에서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제자들의 마음 상태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대속의 사역을 위해 십자가를 지실 것이고 그리고 부활하사 우리를 다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실 중요한 일에 대하여 제자들이 모르고 있었던 이 사실을 요한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꼬집어 자꾸 반복해서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주님과의 간격

우선 이 질문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요구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루어주려고 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집어내기 위해 이 사건을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대했었던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려고 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슬픔을 없게 해 주시려고 무조건 기쁜 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만드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하는 방법과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방법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절)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근심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기쁨을 주십시오.’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의 근심이 변하여 도리어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근심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그들의 근심을 없게 만들어 주고, 기대를 채워주는 것으로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뜻을 이루시는 것으로서 기쁘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여 있게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기쁘고 좋은 일이라는 것도 결국은 예수님께서 힘없이 잡혀 죽으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방법으로 대속하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에 근심이 가득하였으며 다른 방법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과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납득키 어려운 말씀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제자들의 생각 사이에는 서로 다른 팽팽한 긴장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자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뭘 하려고 하시는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그 일에 대해 제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님 왜 그런 일을 하시려고 그럽니까?’하는 질문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는 제자들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다른 존재

누가복음 24장에 가면 대표적인 증거가 하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뿔뿔이 흩어진 제자 중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나타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이 마음속에 있었던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21) 제자들이 바랐던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하며 그들의 모든 고난과 환난과 어려움에서 구출해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끊임없이 육적인 문제에 대한 기대로 예수님을 요구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언급하신 내용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4-15)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선지자’란 구약성경에서 특별히 지칭하고 그토록 예언했던 메시아입니다. 사람들은 그 메시아가 경제와 정치와 사회를 평화롭게 해주며 행복하게 하여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분이라 믿고 여겼기에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손을 피하여 도망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요6:26-27)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메시아라고 선언하셨으며, 사람들도 메시아로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와 실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생각을 하고 계시지만,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생활의 필요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서 메시야를 자꾸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입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과 운명을 주장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사실을 경험케 하여 확실히 믿게 하시기 위해 그들의 병을 낫게 하거나, 갑자기 잘 살게 하거나, 어떤 기적을 이루어 그가 당한 난관을 풀어 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신앙의 본질로 오해하여 신자들의 일상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런 극적인 일만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에는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이 처음에 근심하고 애통하고 걱정한 일들이 기쁨의 환경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인 자신이 그 일을 보는 시각이 영적으로 달라지는 변화를 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고, 기도만 하면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에 대해 예수님께서 지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고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표적들을 볼 때에 우리가 보는 물질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증거로써 그 기적을 보지 못하고, 주를 믿었더니 보이는 세계에서 어떻게 되었다고만 하는 먹고서 배부른 까닭에 연속되는 요구로 일관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들을 보고서 요구하는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빗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보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지금도 우리에게 바로 그 일을 위해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한 후에도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자기 요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1:6)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본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정말 기절할 정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더 힘 있게 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1:7)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예전에는 믿는다 하면서도 육체를 따라 살았었습니다. 이제 영적인 삶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좇는 사람들 보다는 더 주셔야 됩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제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자리입니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은 우리가 젖 떼면서부터 배운 것이지만, 영적인 문제는 우리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던 것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꾸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시면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선을 그으시며 두 부류로 나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요7:33-34)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를 반대하던 그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신분에 있어서 같이 나눌 여지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도마가 엉뚱한 질문을 했음에도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과 같은 영역에 속한 자들과 도마와 같은 영역에 속한 자들이 각각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마와 같은 질문 밖에는 하지 못하는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바리새인들과 같은 부류와는 전혀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3. 변화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예수님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다 보셨지만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부터는 믿는 자만 보는 영역으로 들어가실 것입니다. 즉 거듭난 자만 보는 차원으로 그 사역을 이제 이루시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못 볼 것이라는 말씀은 이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다시 볼 것이라고 한 말씀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믿음의 눈으로만 주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줄을 알기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초대하셨고 선택하셨고 그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영적인 곳으로 옮겨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의 자리인, 오병이어로 먹이시고 우리가 탄 배에 오셔서 광풍을 잠잠케 하던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하는 주님의 삶을 본받아 사는 삶의 자리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사는 삶이 우리에게는 습관적인 것이 아니라 생소한 것이기에 조금만 방심하면 이전의 자리에 늘 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할 터이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한 그 예수 그리스도를 그 전에 보던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르게 보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설교 속에서 그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2-36) 세상이 모두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며 그를 추종하는 자들 까지 다 잡아 죽이겠다는 분위기로 완전히 장악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하여 담대히 반대하고 일어섰습니다. 예전에는 이들이 무서워 움츠려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지금 살벌한 분위기 앞에서, 예전과 동일한 조건과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잡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우리의 삶의 환경과 조건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시각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계속해서 변화된 사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처해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이전에 비해 조금도 개선되거나 나아지지 않아서, 제자들은 권세 잡은 자들 앞에 붙잡혀 가서 협박과 위협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제자들을 더 이상 근심케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제자들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환경에 대하여 예전에는 근심이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도 물어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아니 이제는 그 시작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믿고 난 후의 목표가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이제 알게 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인생의 목표를 무엇에다 두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뀐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에도 삶의 압박과 어려움과 곤고함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과 소망을 바라보며 이 신앙의 길을 기쁨으로 걷게 되는 것을 평안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것으로 바뀌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 지위가 높든 낮든, 부하든 가난하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게 맡겨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고픈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하나님의 일을 못할 것이 없고, 부자라고 해서 못 할 것도 없습니다. 부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도 아니고, 가난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으며, 반대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 주눅들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세상적으로 곤혹스러운 환경 속에 보내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을 지키며 사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허락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시각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괴롭고 힘든 것에만 시선을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가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충성과 순종과 인내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각이 염려와 근심에서 평안과 기쁨과 감사로 바꾸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요한복음 16장에 나타난 주님의 기대와 우리의 기대의 간격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기대하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이유와 또 그것으로 말미암은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도 제자들이 변화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4. 예수님이 택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분하셨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5.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앙은 무엇이며, 그 신앙의 변화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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