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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를 판단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본문 /  고전 4: 1- 5


1. 어떤 싸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일 때 제일 많이 신경 쓰는 부분이 어떤 부분입니까?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하여 마음에 준비를 하면서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렇게 오시는지 아니면 예배당에 입고갈 옷 걱정을 제일 많이 하셨는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제일 많이 신경 쓰는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사람들의 시선일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집안에 있을 때는 화장도하지 않고, 운동복을 입고 있더라도 어디에 간다고 하면 제일 많이 시간을 들이고 신경을 쓰는 것이 아마도 자기를 치장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상대를 의식하는 것이, 상대를 위하며 상대를 살리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주의 마음으로 행하는 삶이겠지만, 단지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치장에 불과한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노래를 복음성가라고 하는데 그 노래가 과연 복음성가가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배척하는 것인데 그 노래는 교회 다니는 사람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좋다고 휴대폰 벨소리로 간직하는 분들도 많이 있음을 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고 또 사랑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동이란 남의 욕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신경 쓰면서 사는 것입니다. 평생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모두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문화라든지, 체면이라든지, 교양이라든지, 윤리나 도덕이라든지, 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렇게 말은 하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또 남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집단의 문화 속에 동화되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에는 자기는 하기 싫은데 남의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분들 중에도 주일예배시간에는 그냥 대충 잠바를 입고 오면서, 남의 결혼식장에는 양복을 입고 다니시는 분이 계십니다. 과연 결혼하는 신랑 신부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마도 그 예식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신랑 신부를 위하여 그랬다면 적어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누구의 결혼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배하러 올 때 정장을 하고 와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옷 중에 제일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는 오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는 제일 중요하고 소중한 분이라는 신앙고백을 그 입고 오시는 옷에 담아서 입으셔야 합니다. 만약에 결혼식장처럼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그렇게 입고 오신다면 그것도 결국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잘 보이려고 하는 인간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교회는 자신이 못난 자임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기의 못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모이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자기 자랑하기 위하여 모인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많이 모자란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 하는 것이나, 헌신하는 것이나 또는 어떤 직분을 맡는 것이나, 종교적인 행위를 잘하는 것들이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직도 많이 모자란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경쟁을 유발시키고 결국은 시기와 분쟁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신앙의 싸움은 사람 앞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해주면 잘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면 평소에 잘 하던 것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하여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렇고 또한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파당이 생기고 다른 파를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사도를 사도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교회는 그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판단하실 이

오늘 본문 3절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을 일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 파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아볼로 파나, 베드로 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얼굴이 못 생겼다고, 말을 더듬는다고, 육신의 질병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러한 평가와 판단에 대해 자유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대해 조금만 나쁘게 말해도 그것으로 죽느니 사느니,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여기 바울이 남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유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판단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시편 3편을 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시3:1-8) 이 시편 3편에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다윗의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 천만인이 자기를 둘러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에게 쫓겨 피난을 가고 있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놀렸겠으며, 아들이 반역을 해서 도망가고 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자기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워 자고 깨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붙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여호와께 있기에 그렇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아마도 부끄러워서 어디 꼭꼭 숨어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옮기든지, 다른 사람들이 모르도록 숨어 지내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모함하고 욕하면 견디지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바울 같은 경우에 그러한 것들은 매우 작은 일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님을 알았기에 천만인이 나를 대적하여도 매우 작은 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또한 4절에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4)고 합니다. 사람의 판단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자기도 자기를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평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아! 나는 왜 이럴까! 나의 꿈은 이게 아닌데 지금 내 신세는 왜 이렇게 비참한가!’ 하면서 자기를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완벽하게 주님의 뜻대로 살았기 때문에 자책할 것이 없다고 하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도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바울도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자책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잘못이 없이 완전하다 할지라도 바울은 그것으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는 자기가 불완전하여 잘못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된 의가 취소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책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의롭다고 판단하실 이가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자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판단도 매우 작은 일로 여기고, 자기 스스로도 자책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의 믿음은 진짜로 판단하실 분이 주님이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남의 판단이나 나의 판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다시 오실 주님만이 자기를 판단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3. 맡은 자의 자세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즉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5) 주님께서 오시면 어두움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인데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판단이나 칭찬이란 중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만물을 벌거벗은 듯이 드러내시는 주님의 판단만이 진실하고 참되신 판단이십니다. 그런데도 바울사도는 1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라고 합니다.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왜 바울사도는 자기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알아달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출신이나 배경이나 학력을 보건데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믿지 못할 것 같으면 내가 행한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울사도의 심정이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여러 가지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내가 전하는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습니다. 그런 자신의 신앙고백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는 충성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 자를 세울 때에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사로 성가대로 집사로서 충성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충성들을 잘하면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상급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직 충성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충성한다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꺼려하고 미련하다고 여기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판단에 휘둘리지 말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판단이나 나의 외적인 조건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도가 곡해되어 전달되거나 오해되어 전달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충성은 맡겨진 일을 맡기신 이 보시기에 만족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일을 만들어 하는 것이 아니라, 맡기고 시킨 일을 최선을 다해 주인보시기에 아름답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소식입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면 사람들의 판단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에는 옥에 갇힌 바울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울을 좋아해서 전하는 자와 싫어해서 옥에 갇힌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 소식을 옥에서 전해들은 바울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바울은 자신을 괴롭게 하려고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렇게 전하여져도 그리스도가 전하여 지니 자신은 기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충성된 모습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판단 받는 것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인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기뻐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일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남의 판단 때문에 하고 있지는 아니면 자기 양심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양심에 바르게 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자기 양심에 옳은 대로 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든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를 판단하실 주님 앞에서 매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시고,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판단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매일의 삶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실 수 있는 예원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남을 의식하는 문제에 대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 우리 신앙의 싸움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냐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다윗이나 바울 같은 믿음의 선배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각은 물론 자기 자신의 판단까지     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사람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바울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바울이 말하는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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