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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 마음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본문 /  요16:22-24


오늘 본문은 앞부분의 말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특히 23절의 ‘묻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흠정역에 보면 ‘구하지 아니하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에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이렇게 되는 셈입니다. 이 말씀은 언듯 보기에는 모순이 됩니다. 구할 것은 없고 그러나 구해야 되는 이상한 설명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 좀 더 확실하게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좀 더 분명해지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1. 그 날 이후

먼저 우리는 이 말씀이 어떤 내용 가운데서 나왔나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본문 앞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걱정과 근심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절)라고 말씀하셨기에 더욱 근심할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충분히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시킬 수 있으신 분이신데 왜 굳이 떠나시겠다고 하시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3년 동안 따라 다녔으면서도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의 중심 내용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와 근심이 생기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충실하고도 일관성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해 묘사하는 말들이 하나도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고 하자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너는 지금 장님이라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말씀도 결국은 예수님의 제자 노릇은 했지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오병이어와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더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근심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해서 어떤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고 확신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적인 선상에 서 있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한 것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와 같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신앙고백을 하고도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을 가로 막아서는 일까지 서슴없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하시는 일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면 행하는 모든 능력과 체험들은 전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기적과 하나님께서 갈급한 문제들에 대해 응답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최고의 핵심은 아닙니다. 결국 무엇이 핵심인가 하는 사실을 혼동하여 그 순서가 뒤바뀐 신앙들이 우리에게는 많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일들을 왜 제자들에게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묘사했는가를 추적해야 됩니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일을 이루셔야 만이 우리의 영안이 뜨여지고 비로소 하늘나라를 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모든 문제들이 풀립니다. 이 땅에서 살았고 또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이 가진 ‘사람은 왜 태어나며 또 태어났으면 왜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병들고 고생하며 죽어야 하는가? 또한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고민에 대해 답을 얻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영안이 열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답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 얻은 우리는 하나님께 창조되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압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배반해서 생명과 축복의 자리에서 떠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생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한 아직도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기에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나님의 심판을 보류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생하며 사는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보류되고 있기에 정당한 신자들이 거꾸로 세상에서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의 복음과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신자들이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2. 변화

사도행전 4장에는 복음을 위해서 제자들의 변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0-41) 제자들이 예수님의 편을 들고 있는 것 때문에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억울해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에게 더 이상 갈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이 잠시 머물 곳이요, 영원을 준비할 한 번 밖에 없는 기회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썩어질 세상의 것만 위하고,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하고, 죽음이 코앞에 이르렀음에도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고 착각하며 살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한 번도 제대로 준비해 본 적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무엇을 준비하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리는 우리가 타고나거나 우리의 실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일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살게 될 전혀 다른 인생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 인생은 내 계획과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가게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손에 있지 않으며, 세상은 그것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뺏을 수 없고, 세상의 것으로는 도움도 안 되고 방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었지만, 목표와 생각은 하나도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고,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음에도 그 충만한 기쁨을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목표와 생각과 시각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것들로부터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이 오더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로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길을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며, 남들이 나를 낮게 평가하더라도 이 일은 항상 내게 의미 있는 일이며,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들로 내가 커간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후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다시 약속이 연결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내 이름”으로 다 주시겠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과거에는 가치 없는 것들을 기도 제목으로 삼는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의 기도 제목으로 넘어와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3. 기도

골로새서 1장에는 이런 기도의 좋은 모범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바로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육신적은 욕망을 위한 요구가 아니라 오직 영적인 수준 향상을 위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 속에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무엇을 좋아 하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란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 하며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종교적인 행사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며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견딤과 오래 참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자들이 제일 못 참는 것은 옳은 것을 주장하다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용서를 놓친다는 점입니다. 내가 정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옳은 편에 섰느냐 뿐만 아니라, 옳은 자세와 태도를 가졌느냐도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항상 승리하고 성공해야 되는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밟아서 쓰실 때도 많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기도의 참 내용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1:19-2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의 본 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신 모습을 보고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에서 ‘내가 누구며, 십자가는 왜 필요했는가?’를 놓치면 이상주의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신과 주님을 깨달아 아는 지혜나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에 십자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이것저것을 구하기에 앞서 언제나 은혜와 긍휼로서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먼저 구하는 차원에서의 ‘무엇이든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런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에 은혜와 긍휼을 먼저 구하는 것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자연인의 마음속에는 이런 기도에 대한 마음이 없기에 우리가 이미 정당한 기도를 하고, 정당한 기도 제목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그냥 ‘기도하면 되는데’라는 말을 하지만 그러나 기도는 우리 열심의 산물이 아닙니다. 제대로 안 되는 것도 더 열심히만 기도하면 무조건 되고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도하러 들어갈 때마다 은혜와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며, 마땅히 빌 바를 깨우쳐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면 이 모든 기도가 영광과 축복이라는 결론으로 바뀌어 지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1:24-29)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데는 참으로 긴 시간의 훈련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훈련은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란 신비한 곳이고 놀라운 곳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리라 결심했는데도 누구와 틀어진 마음이 아직도 안 풀려요.’라는 말이 나오는 곳입니다. 교회 밖이라면 어떻게 하겠는데 교회 안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일들을 참고 견디면서, 우리 자신의 성품에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들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것을 고치게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보고 배울 것이 있는 선생이 되며 또한 제자가 되는 그런 이익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들과 계명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쉽게 우리의 것이 되리라고는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기에 계속 해 보셔야 하며 그 연습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 와서 부딪치며, 섞이며 일을 함께 나눠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 아직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정당한 기도와 구체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며, 거기서 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처럼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배우며 실천해서 내 것을 만들게 됩니다. 이제 깨달았다고 다 된 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제 다 알고 깨달았으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 성경입니다. 깨닫고 결심했다면 이제 입 다물고 참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아멘!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기독교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를 만병통치약으로 파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시선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와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그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에게는 빼앗기지 않을 기쁨이 있습니다. 만약에 빼앗겼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기쁨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그리고 죽어서 영광된 자리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그 하늘의 맛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변해야만 됩니다. 기도가 변하고 삶이 변하고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변하셔야 됩니다. 그럴 때에 세상이 도무지 빼앗을 수 없는 천국의 영광과 기쁨을 맛보면서 승리하며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의 제자들이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그런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 놀랍게 변화된 원인은 무엇이며, 우리에게는 그런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너희가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후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4.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적인 기도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우리 안에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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