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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계획하신 우리 구원의 완성

본문 /  요16:25-33


요한복음 16장은 전체에 걸쳐 신자란 영계를 준비하는 자들이지, 이 땅을 목적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세상살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세상의 물질계에서 영원한 영역인 영적인 세계로의 변환을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있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죽었던 생명이 소생하며, 무엇이 행복이며 복인가를 아는 수준으로 세워 질 때에 허락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약속은 이제는 우리가 그 목표를 바르게 알고 구하고, 정당한 것을 기도할 수 있는 수준의 신자가 되었다는 뜻이 포함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로 구할 수 있는 수준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단지 예수님만의 덕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도 상관이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사랑하사 대속하시고 구원하시는 이 일은 예수님의 일인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지, 원래 우리를 미워하셨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하셨기에 하나님도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은 신이 있다면 인간의 지성에 감동되어 안 주고는 못 참을 것이라는 식의 무속 신앙의 형태로 흐를 위험성이 다분히 있기에 더욱 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속 신앙식으로 기독교를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감동시키러 오셨고 그 감동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그런 식으로 지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계획

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로마서 3장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1-25) 지금 이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시행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과 뜻이 없었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몰래 오셔서 마치 아버지가 쫓아낸 아들을 엄마가 몰래 부엌으로 데려가 따뜻한 밥을 먹이고 달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과 화목하게 할 것을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는 이미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노력하고 힘쓴 어떤 것 때문에 이 구원의 지위를 얻고, 이 자리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식의 구원이 정리되어 있으면 신앙은 천국 들어갈 때까지 흔들리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식 구조가 구원받은 신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의 진전과 성장에 늘 실패하고 마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간섭하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늘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한 것을 다시 용서받는 일만이 유일한 신앙의 문제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 몰래 도망갔다가 실수를 했으니까 이제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울고불고 되돌아오는 신앙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으로 사랑을 했으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어떻게 당신의 자녀를 삼으셨는가 하는 사실을 냉정히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데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이 사랑하셨는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나의 운명이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초가 되어 ‘이제 나는 도망칠 수 없다. 나의 운명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완전히 책임져 주시는 안심이 되는 삶인 동시에 나는 죽었다고 복창한다.’라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도망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안심스러운 운명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4-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것도 다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때가 차매” 그것이 이루어 졌습니다. 세계 역사는 어떤 민족과 문화의 싸움이 아니라 오직 이 구원의 역사,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시며, 그의 부르신 자녀들을 구원 얻게 하시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혹 우리 중에 지금 이 시대와 지금의 환경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거나, 나를 하나님께서 좀 더 여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더라면, 나를 좀 더 멋있게 만들었으면 내가 더 예수를 잘 믿었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면 좀 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의 범죄는 기껏해야 배가 고파서 저지르는 생계형 범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강력범죄와 성범죄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서구 사회에서는 성범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완화시켜서 성을 개방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약물중독에다가 마약 중독 등으로 폐인들이 득실거리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부패합니다. 선한 것을 도무지 만들어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만 해 주시면 내가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할 텐데..’라고 끊임없이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하나님이 자녀로 항복시키는데 있어서 결코 손해를 보는 길로 가게하시지 않습니다. 때가 차매 누구를 어느 집에 몇째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고 고등학교를 두어 번 쯤 떨어지게 하시며.... 이런 식으로 인도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며, 그 앞에 항복하게 하셔서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집념과 사랑과 열심 그리고 그의 계획들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슨 반응을 하였거나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갖고 계시는 그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입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4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분의 개인의 뜻이나 개인적인 계획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로 묶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좀 더 자세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12:44-50)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성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이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은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좀 극단적인 표현이지마는 이제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어떤 일을 하시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의심을 버리십시오. 로마서 8장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롬8:31)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그러면 나를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만큼 우리를 편드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33)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며 의롭게 하시며, 그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는 대가를 치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며 이 일을 이루시기로 결심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운명적인 내용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4-35) 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롬8:38-39)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그 사랑이 무슨 희생을 치르고 실천되었는가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하심

여기에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 할 결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부르셨고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걸 맞는 자로서 우리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우리가 지금 내 발로 걷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내 인생이 내가 움직이는 대로 다 될 것 같지만 그러나 아닙니다. 자식이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움직이지만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부모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그 집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게 되면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어떤 심각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우리하기 좋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라는 혼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엄청난 집념과 기대인 것입니다. 신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랑을 입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열심어린 손에 잡힌바 된 자들입니다. 결코 자기 멋대로 사망과 멸망의 길로 가도록 허락되지 않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나태하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길이 아니라 훈련되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고쳐 나와야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울고불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자녀 삼으셨는데 그런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 왔다 갔다 하였었다고 하는 회개로 그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게 하는 울고 불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가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간 그 시점으로 돌아와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가는 결단으로서 돌아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구원관을 감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늘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감상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실패를 하였을 때에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감정을 풀어드리고 설득시켜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제사로써 회개하는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실족하고 실패하였다고 등을 돌리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서 떨어져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 하나님의 자녀의 길이 힘들다고 팽개치고 도망갔다 오는 일을 자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팽개쳤던 그 일을 묵묵히 다시 하기로 결심하여 내가 지난번에 어디서 넘어지고, 어느 유혹에서 졌는가를 확인해서 다시는 거기서 넘어지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거기서 실패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으로 강하게 되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내가 요구한 인생과 하나님이 내게 요구한 인생 사이에서 충돌되고 무너집니다. 특히 그것이 눈앞에 이익에 관한 문제일 경우에는 영락없이 내 고집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에게 내 자녀에 관한 문제, 먹고 마시는 문제 또한 자존심에 걸린 문제들일 경우에는 십중팔구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길을 가기보다 그 이 길을 잠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서 놀고 오겠다는 자들입니다. 늘 여기서 넘어져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은 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항복하여 되돌아오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패하는 경험들을 돌이킬 때에는 늘 우리가 무엇에 넘어지고, 어디서 넘어 졌는가 하는 것을 바로 알아서 그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거기서 넘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아서 다시는 그 문제로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의 넘어짐과 그 시행착오가 우리로 하여금 실패가 아니라, 우리를 더 강하게 하는 요소로서 밑거름으로서 디딤돌로서 남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를 이 구원과 영생과 복의 길에서 아무도 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심각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기뻐하시는 이 길을 가겠다고 더 많이 맞기 전에 우리의 인생과 진심을 갖다놓고 항복하시고 그 길을 깨닫게 해 달라고 요구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요한복음 16장 전체에 걸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내가 아버지의 뜻을 받고 와서 행하고, 이제 아버지께 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자가 되어 이제 아버지께로 갈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그런 인생을 지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신 모든 것을 방해할 자가 없는 길을 걷게 된 이 평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신앙의 진전과 성장에 대한 내용이 없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2. 갈라디아서 4장의  “때가 차매”가 갖고 있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결론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입니까?

4.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한 엄청난 집념과 기대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기에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와 태도는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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