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1,663
오늘 : 125
어제 : 256

페이지뷰

전체 : 78,743,786
오늘 : 767
어제 : 1,287
조회 수 149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본문 /  롬 6: 1-11


1. 착각

기독교에 있어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에 대한 부활의 약속은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활사건이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을 단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성경 속의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매년 부활절이 되면 모든 교회들이 여기저기서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며 부활을 외치지만, 그 모든 것이 연중행사로 그쳐버리는 것도, 일 년간 잊고 있었던 부활에 대한 내용을 부활절을 기회로 다시 기억하는 수준에 머물러 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은 죽은 몸, 즉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깊이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나도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부활한다는 막연한 미래적 기대감을 갖는 것으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을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자에게 새 생명에 대한 소망을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어진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부활 또한 진지한 마음으로 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날 부활을 믿는다는 우리들에게는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 생명은 우리의 육신의 가치를 향상시켜 주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새 생명에 대한 소망도 갈망도 상실된 채 부활은 나중의 일로 밀쳐버리고 오늘이라는 현실 가운데서 성공한 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의 신앙의 현실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라면 분명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고 신자로서 정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것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삶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목말라하고 갈망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육신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신을 향한 욕망이 멈추지 않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몸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즉 죄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죄에 붙들려 있는 자신의 현실을 자신의 삶에서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고,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믿는 우리들이라고 해서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처럼 죄의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즐거우냐 아니면 즐겁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즐겁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돈이 많지 않아서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기 때문에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련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심령이 깨어있는 신자라면 죄와 사망의 종에서 벗어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붙들려 살아가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애통해 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이러한 괴로움과 애통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2. 부활신앙

이러한 신자가 추구하고 갈망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새 생명의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부활의 세계이기 때문에 신자는 자연히 부활을 갈망하면서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신자입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문제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고 말씀을 합니다. 과연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은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부활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5절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그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설명되어집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10-11) 여기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기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안다면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한 감각, 즉 죄를 향한 악한 속성 자체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죄에 대한 감각 자체가 죽은 것이라면, 신자는 그 어떤 죄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전히 죄에 붙들려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라는 말씀을 합니다. 신자라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을 구실 삼아서 죄에 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죄를 즐길 수 없는 사람이고, 죄에 대해서는 애통해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은혜를 핑계 삼아서 죄에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 죽은 것이 신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를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싸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창32:24-30) 야곱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많은 가족과 재산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 에서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자신의 소유를 쳐서 빼앗아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빼앗긴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자신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 두 떼로 나누고,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를 가지고 피함으로 자신의 소유, 즉 야곱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다 건너보내고 홀로 남은 야곱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실 수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쳐서 이길 수 있었을 것인데 이기지 못함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힘이 더 센지를 가려내는 힘겨루기가 아닙니다. 야곱과 씨름을 하는 사람이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은, 야곱이 힘이 세었다기보다는 자신의 복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야곱의 강한 욕구의 분출인 것입니다. 야곱이 가진 세상의 복에 대한 강한 욕구는 하나님조차도 이기고자 할 정도로 강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이런 욕구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라도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목이 터져라 기도하고, 몸이 부서져라 봉사하고, 빚을 내서라도 헌금을 하는 이 모든 것이 복을 두고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어코 하나님께 내가 원하고 기대하는 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욕구를 하나님이 꺾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 즉 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뼈를 쳤다는 것은 야곱의 힘을 꺾어버린 것을 뜻합니다. 더 이상 씨름을 할 힘이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힘없는 자로 엎드려 간구하는 자가 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과 씨름한 이유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다루십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복을 받기 위해 씨름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힘을 모두 잃어버리고 절뚝거릴 수밖에 없는 자가 되게 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경쟁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힘을 잃은 자로서 엎드려 간구하는 자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그가 엘과 싸우다’란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엘’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한 것처럼 또는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바알이 하나님인지 대결했던 것처럼, 여기에서의 엘은 그냥 신인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많은 가족과 재산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여 ‘엘과 싸우는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곡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원하는 복을 받기 위해 씨름하는 존재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참 복이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자로 존재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인도해 감을 증거 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야곱처럼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 된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직 자신의 성공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한 자로 살기를 원하는 그가 바로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에게 죄는 곧 원수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죄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로 대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신자는 죄를 즐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에 대해 싸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끌려가는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함을 목격할 때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고 애통해 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새 생명의 세계, 즉 부활의 세계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부활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신자를 강하게 붙드는 소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죄에 대하여는 죽었지만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되어진 새 생명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이 곧 새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산 자의 삶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죄로 인해 죽을 몸에 불과한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이 나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임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스스로 하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인 것처럼 신자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능력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 신자가 어떤 존재이며 또한 신자의 자랑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게 됨으로써 땅의 것이 힘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힘이 되어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산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면 자연히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권세가 힘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이 힘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세상에 우리의 소원을 두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의 배부름과 풍부함이 힘이 아니며, 나를 궁핍하게 하고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 신앙을 방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 너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세상이 능력이 아니라 능력되시는 분이 따로 계시기에 배고픔과 배부름, 궁핍과 풍부함이라는 어떤 형편에서도 그것으로 신앙에 영향을 받지 않는 능력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한 자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신자의 소원과 자랑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원과 자랑을 세상에 둠으로 인해 신자들이 전혀 영적이지 않는 일에 아우성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6-7)고 말합니다. 신자는 옛 사람이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의 길을 가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 의의 길을 가야할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에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소원할 것도 예수님이 가신 의로운 길이지, 세상을 자랑거리로 삼는 죄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신자 됨을 다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로서 우리가 달려감이 무엇에 소원을 두며, 무엇을 자랑으로 삼는 길인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죄 아래 있었을 때는 자신과 자신의 자랑을 위해 항상 이웃과 경쟁과 비교했던 악한 존재였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로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길을 가지 않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산 신자로서의 새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자랑과 기쁨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답게 신자에게 주어진 영광과 승리와 자랑을 우리의 것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며 결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복된 신자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갈망하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갈망하는 것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 앞에 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소망 삼고 또 주님만을 자랑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부활생명을 가진 자다운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의 부활에 대한 착각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은 무엇입니까?

2.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야곱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보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된 자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73 3월 13일 1부 /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믿음 40 관리자 2011.03.12 1560
672 3월 20일 2부 / 심고 물은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관리자 2011.03.19 1497
671 3월 27일 2부 / 우리의 터와 우리가 쌓는 공력 331 관리자 2011.03.25 2734
670 4월 3일 2부 / 하나님의 것이 된 우리의 자랑 관리자 2011.04.02 1322
669 4월 10일 2부/ 우리를 판단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관리자 2011.04.09 1319
668 4월 17일 2부 / 말씀 안에서 우리가 삼아야할 참 본 관리자 2011.04.15 1469
» 4월 24일 /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관리자 2011.04.23 1498
666 5월 1일 2부 / 세상과 이별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관리자 2011.05.02 1725
665 5월 8일 2부 / 묵은 누룩을 버리고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11 관리자 2011.05.07 1826
664 5월 15일 2부 / 사귀지 말아야 할 자와 사귀어야 할 자 관리자 2011.05.14 1753
663 5월 22일 2부 /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관리자 2011.05.21 1566
662 5월 29일 1부 / 하나님이 값으로 산 하나님의 것 되었으니 관리자 2011.05.29 1570
661 6월 5일 2부 / 부부생활을 통해 보여 지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관리자 2011.06.05 1568
660 6월 12일 / 결혼과 이혼 그리고 하나님의 뜻 443 관리자 2011.06.12 4725
659 6월 19일 /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관리자 2011.07.02 1521
658 6월 26일 1부 / 잠시 지나가는 세상을 사는 우리의 신앙 관리자 2011.07.02 1559
657 7월 3일 2부 / 성경이 말씀하는 바른 지식과 사랑 2 관리자 2011.07.02 1585
656 7월 10일 2부 /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위하여 2 관리자 2011.07.09 1806
655 7월 17일 2부 / 오직 복음을 위하는 바울의 변명 관리자 2011.07.17 1863
654 7월 24일 2부 / 바울의 자랑과 바울의 상 17 관리자 2011.07.24 231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