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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자 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존재 가치    

본문 /  요17: 1- 5               


예수님은 13장부터 16장까지 제자들과 여러 말씀들을 나누시고, 17장에 이르러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셨음을 말씀하기는 하지만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오늘 본문에서는 그 내용이 기록되게 하심으로 이 기도의 내용들을 제자들이 알아야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이 기도의 내용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이 기독교인이 된 표로서 삼아야 될 중요한 내용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란 무엇인가 하는 내용에서 오늘 이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을 설득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사는 삶의 모습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가장 큰 가치로 인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신자라는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신자의 정의

먼저 신자란 무엇인가 하면 말뜻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명령을 믿고 목표로 하여 살아가는 자란 뜻입니다. 그런 신자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문으로서, 여기에 나타난 신자의 모습과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 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표와 기준으로 삼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우리들은 그 중심 내용이 아닌 것들로 신앙의 표준과 목표로 삼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행복과 승리를 추구 하고, 외치는 이상한 풍조가 교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가져야 할 신앙의 정당한 내용들과 소망해야 할 약속들이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잘못된 신앙의 핵심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아픔은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원리와 목표와 세상에서 살아가는 원리와 목표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갈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들을 잘못 가지고 있기에 신앙과 세상이 공존하며 타협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자로서 정당한 내용은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연약함을 노출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올바른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와야 하며 그래야만 제대로 변화되어갈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떳떳한 신앙인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죄 짓고 사는 세상살이와 예수 믿는 것 사이에 전혀 갈등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신앙의 약속과 내용들이 세상살이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으며, 도리어 세상에 나가 충돌되지 않을 것들로 신앙의 내용을 삼아 버린 신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낫고,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고, 돈도 잘 버는 복들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데 필요한 부수적인 이런 것들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아 버릴 때 우리는 세속적인 신자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신앙의 대부분을 거는 신자들은 결국 신앙의 핵심을 놓치게 되어 신자답지 않는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아무런 갈등 없이 세상과 교회를 오락가락 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과연 신자란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에서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전 내용을 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뜻을 다 펼치셨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주요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나타내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내어서 내가 이 땅에 온 줄 알게 하였고 또  내가 하는 말이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께 속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나를 통해 아버지를 나타내신 것같이 저들을 통해 아버지를 나타내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저들에게 책임을 준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은 그 사랑의 긴밀한 관계 속으로 저들을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어 하나인 것같이 우리 안에서 하나입니다.’라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신자의 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란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모습이 표현되는 자입니다. 신자는 어떤 말과 행동을 표현하기 이전에 그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살며, 하나님과 같이 있으며, 하나님을 보는 자로서 존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의입니다.


2. 참된 신자

그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5장에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여기 착한 행실이라는 것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윤리나 도덕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빛이고 소금입니다. 세상에서 신자는 유일하게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뭍어 있는 다른 존재입니다. 이것이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을 초월한다는 것이 뒤의 말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38-48)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리로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돌려댑니다. 바보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복수심에 관한한 손 놓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쩌면 그토록 몰상식하고 더럽게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존심을 참으면서 복수심으로 맞대꾸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자이기에 더 이상 사람들과 생존경쟁을 벌이지 않는 자입니다. 사실 여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도 인간의 복수심을 절제케 하기 위한 요구였습니다.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면 피해를 본 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당한 피해보다 몇 갑절로 되갚으려 하니까 그렇게 당하는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을 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피해를 본 것 이상으로 피해를 준 자에게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 말씀을 거꾸로 복수심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각자의 욕심을 따라 해석하기 시작하면 성경만큼 편한 게 없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채찍을 들어 상인들을 쫓았다는 것을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폭력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갖다 붙이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내용이 무엇을 지시하며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성경만큼 어려운 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바로 파악하는 노력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바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생존 경쟁의 자리에 서지 않으며, 더 이상 사람과 싸워 이긴 것을 승리로 삼는 자는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행복이나 성공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신자의 삶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나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나도 가지며, 하나님의 기뻐하심 속에 나를 놓는 것을 원리로 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같은 원리의 부산물로서 아름다움이 있고, 봉사가 있고, 헌신이 있고, 충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나 헌신이나 충성 그리고 죄를 짓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더 밀접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동기와 결과로서 봉사와 헌신과 충성이 있고 죄를 멀리하는 것이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자신이 다른 신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봉사와 충성과 죄를 멀리하는 것은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우월감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죄도 짓지 않고 사는 사람 같은데 이상하게 그 사람과는 같이 있기가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잘 나 보이는데도 만나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신자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사랑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그를 보면 ‘나는 실수를 안했다. 나는 하라는 것을 다 했다’ 하는 식의 자기 치장과 자기 의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사람을 참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 신자란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서 비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게 이 표현을 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입니다. 로마서 5장 말씀으로 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우리의 위험성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로 말미암아 빛나고 향기가 가득하게 되어야 할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3. 다른 삶

우리나라에 오늘날처럼 기독교 신자가 많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오늘날만큼 욕을 먹고 힘을 잃은 때도 없습니다. 이토록 많은 신자가 있음에도 기독교가 맥을 못 쓰는 것은 바로 믿는 우리가 아직 새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여전히 옛사람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4:17-20) 이것이 불신자들의 생활인데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우리 신자들의 생활이 이것과 방불하다는데 있습니다. 이방인은 그 마음에 허망한 것, 즉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바람에 날리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방인들처럼 돈을 구하고, 자녀들이 공부 잘하는 것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 목표와 목적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의 편안함과 만족을 위해서 구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남을 게 없는 허망한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기억된바 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들인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은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방탕’하다는 것은 허비하고 소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시간만 흘리고 있는 것을 방탕하다고 합니다. 미련하고 게으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흘러가는 내게 주어진 이 삶의 시간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되는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땅의 삶이 끝났을 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일을 위하여 시간을 소모한다면 그건 방탕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허비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하고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상하면 하나님께 항상 물어야지만 바른 길을 갈 수 있고 발전과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우리 신앙의 지적되어야 할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7-19) 여기서 우리 자신을 위해 놀라운 지적을 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참여한 다른 존재들이며,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를 볼 수 있었듯이 우리를 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보며,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인 의와 거룩과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본받아야 하며,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 모범들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를 통하여 나타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금 읽은 말씀에서 지적한 바대로 그 마음에 자리 잡은 탐욕입니다. 탐욕이 종교로 덧칠하여 사기가 행해지고, 양의 가죽을 쓴 이리로 행세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좀처럼 항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른 항복을 하지 않았기에 그런 우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적인 삶의 모습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빌3:20)며 사는 자들입니다. 만일 내일 주님께서 오신다 해도 우리는 곤란한 일이 없어야 하며, 미련 둘 일도 없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재미있을 수 없으며, 하늘나라의 것으로 재미를 가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이 세상 것으로 목표를 삼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세상적으로 괜찮은 지위와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끊어버리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아름답게 나타나게 되는 그런 주 안에서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신자에 대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2. 신자들이 신앙에 대한 본질을 잘못 가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을 둔 참 목적과 우리의 오해는 무엇입니까?

4. 우월감 신앙과 참된 신앙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5. ‘허망’하고 ‘방탕’하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항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8.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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