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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값으로 산 하나님의 것 되었으니

본문 / 고전 6:12-20

 

 

1. 방향성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은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 어떤 행함으로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죄와 사망에서 또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6:12)고 합니다. 여기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무엇이나 할 수도 있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는 바울 사도는 어느 정도로 자유로운 사람인가를 고린도전서 8장에서 보겠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고 하면서,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고전8:8)고 합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우상의 음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을 자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고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19-22)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해 율법 있는 자처럼 행동하였습니다. 또는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모든 것이 가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제제를 받지 아니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하게 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인간의 종교성에서 자유하게 되며 또한 율법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유를 과연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을 듣고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자유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 자유를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았는지 오늘 말씀으로 진단 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3-15)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는데 과연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방향성을 제대로 안다면 그 자유를 자기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와 몸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육체 또는 육신이라는 것은 경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반대되는 세상의 쾌락과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경향성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너희의 몸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 즉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종노릇하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온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성취하신 분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사로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입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자들을 성도라고 하고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한 몸이 되었기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몸으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나 가하며, 누구에게도 제제를 받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미 자기는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 우리는 이런 부담되는 말씀을 들으면 대부분 우리가 다 죄인인데 별수 있는가 하며 시쳇말로 어찌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살아도 나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나를 위하여 죽고, 먹어도 마셔도 입어도 전부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아주 정당화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봉사할 일들이 있습니다. 모든 봉사를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하여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입니다. 누가 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 결정을 누구를 중심으로 결정하신 것입니까? 내 몸을 위함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자기 몸을 먼저 챙기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몸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싫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들면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몸이 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몸을 위하여 사는 모습이 바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고전6:13 상) 식물은 배를 위하여, 배는 식물을 위한다는 이 말씀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배를 신으로 섬기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자기를 사랑하려고 하니까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니 모든 것이 감사가 없이 인색해지는 것입니다.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자신의 편안함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들이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우리 모두가 다 해당되면서도 우리는 뻔뻔스럽게 살아갑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하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며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자기가 그렇게 사는 것을 정당화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은 자기를 배를, 자기의 욕망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을 다 폐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희락과 평강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과 평강을 성도인 우리들이 몸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을 섬김으로 맛보는 곳이 교회라는 곳입니다. 형제와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울리다 보니 여러 가지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멀리 서서 바라만 보며 구정물에 손 담그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바로 자기의 몸만 챙기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6:13 하)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몸이란 음란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음란이란 다만 성적인 음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장의 모든 말씀들이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몸의 쾌락과 안일만을 위하여 산다면 그것이 자기의 배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기 몸의 편함만을 위하여 사는 것은 다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몸이란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성도의 몸을 위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자신의 딸이 귀신들려 예수님을 찾은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고 하여 자신을 개처럼 취급 하여도 자신을 그렇다고 인정하면서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하는 믿음으로 그 딸이 고침을 받는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은혜로 주인의 상에서 먹는 자들이 되었지만 안일과 나태와 포만감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배만 부른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앞으로의 설교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분들 위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인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기쁨과 감사가 그리고 거기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말입니다. 자기의 몸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마치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선수를 보며 코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만 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당장 갈아 치우라고 난리지만, 정작 자기가 직접 뛰어 보면 생각처럼 잘 안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그냥 보는 것과 직접 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이면 몸에 근육통 정도가 아니라 인대파열로 입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한다는 것은 마음이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몸의 구원입니다. 교회의 연약한 모습이 보이면 코치처럼 말만 하지 말고, 직접 그 사역에 몸을 드려 뛰셔야 합니다. 내 배는 불렀으니 이제 포만감으로 뒷짐 지고 다른 사람 코치만 하려 하지 말고, 주께서 그렇게 우리 배를 부르게 해 주신 이유가 무엇이지 생각하시고 연약한 지체를 위해 뛰셔야 합니다. 수고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몸만 위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으로 아름답게 세워진 자답게 순종하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3. 성전

오늘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는 그 당시 헬라철학의 영향이 많았습니다. 바로 스토아학파의 이원론입니다. 정신은 고상하고 물질은 저급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철학에서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모습이 나오는데 하나는 금욕주의고, 다른 하나는 쾌락주의입니다. 금욕주의란 자기 몸을 괴롭게 해서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금욕적인 고행을 하더라도 육체 좇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2:23)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금욕적인 자들은 본 것을 의지하여 육체의 욕심을 따라 과장하는 것이니 그런 것을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도 우리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속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쾌락주의입니다. 어차피 영혼은 구원 받아 놓았으니 몸은 어떻게 해도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 영향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기에 음행한 자를 책망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몸을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 몸 하나 즐거우면 최고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먹고, 나를 위해 입고, 나를 위해 교회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나를 위해 주어야 하고, 예수님도 나를 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자기의 몸만 챙기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몸이란 어떤 관계로 주님과 맺어져 있는 것입니까?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4-17)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몸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누구와 합하면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창기와 합하면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와 한 몸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몸이 누구 것이냐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와 합한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고 하십니다. 성도의 몸이 성전입니다.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한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몸 된 성전인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그 영광을 돌리는 것은 법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금욕주의나 율법주의가 됩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쾌락주의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셨다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와 합한 자 되었으니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유자로 사셨던 것처럼 그분의 몸 된 우리도 자유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시고 주의 성전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원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의 종노릇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아름답게 드러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자유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2.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 성경이 말씀하는 자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 자기의 배를 신으로 섬긴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자기의 배를 신으로 섬기는 삶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삶은 무엇입니까?

5. 고린도교회에 헬러철학의 영향으로 나타난 거짓 된 증상은 무엇입니까?

6. 성도의 몸은 주님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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