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을 전하는 자 그리고 붙잡는 자
본문 / 행 4: 1- 4
1. 불신앙의 삶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생각해 본다면 그런 기적 뒤에 따라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인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을 행한 자가 목사라면 그 교회는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염두에 두고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고 또 이러한 환상을 꿈꾸며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목회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그런 결과가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성경의 현장, 즉 실제 그 일이 있었던 사도행전의 현장에서는 과연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도 그 시대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것이 복음으로 인한 진실 된 결과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현실이 복음의 참된 결과라면 그것으로 지금 우리의 삶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은 복음을 담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되는 기적의 일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고서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보게 될 때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왜 우리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면서 ‘이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다시 사신 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러한 일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증거 함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의 주체자가 자신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였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를 성하게 하였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심으로 세상이 얼마나 악한 세력에 붙들려 있었는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실체, 즉 인간들의 실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바리새인들은 우리 생각처럼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레에 두 번이나 금식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기에 힘을 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의 실체가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체를 감추기 위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 앞에 돌이켜 회개를 하게 되면 복 된 자이겠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은 이 세상은 죄와 사망 아래 놓여 있어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로 새롭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소식은 온 세상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뒤 엎어버린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아래 있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에 대한 부지런과 열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무지 다른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기득권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더 열심히 자기들끼리 뭉치고 있고, 반면에 그렇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부류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자기 자녀를 일류대학에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가운데 예수를 믿는 것도 자신들에게 하나의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자들이라면 그들 역시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의 부활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2. 부활의 도가 싫은 자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행4:1-3)라고 합니다.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을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함께 듣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자들로서 로마의 통치하에서 그들과 결탁하여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살기 좋은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 세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하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죽기를 소원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죽어도 사는 것이니 부활을 좋아한다고 할 것입니다. 부활이 좋아 일요일마다 놀러 다니지 않고 교회 오고, 헌금도 하고 해서 부활에 대한 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부활은 내가 죽은 다음에 챙기기로 하고, 우선은 이 세상에서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부활을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부활이란 다른 세상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의 성품은 여전히 세상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두면 우린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사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자기 교회를 챙기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죽은 자처럼 취급하며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주를 위해 어떤 큰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내가 정말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소망과 계획들이 과연 주님의 원하시는 것인지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은 간데없고 우리의 위신과 자존심만 위한 것이라면 그것 역시 부활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가 원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일 하신다면 좋겠는데 주님은 내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하는 일을 책망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싫은 것입니다. 나는 계속 세상을 사랑하고 싶은데 성경은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니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데 도움을 주시고 또 죽어서도 부활하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삽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부활을 싫어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가르치며 전하는 사도들이 싫어 그들을 가두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했던 복음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말로 여겼고 또 자신들의 종교적인 체제를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기에 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제거했는데 그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면 결국 자신들이 한 일이 크게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든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도를 가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제사장은 당시에 성전에서의 모든 제사를 집행하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그 권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군중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하는 것은 자신들의 소관인데,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도를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위협을 느끼게 되고 또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아무런 합법적 권한도 없는 사도들이 군중들에게 예수님의 도를 전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을 지키는 자들을 말하며 제사장 다음가는 종교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그 권력을 흔드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싫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유하고 지체가 높은 사람들로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적 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그들의 합리주의적인 사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었기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대한다는 것조차 헛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메시아는 단지 이상이었을 뿐이지 실제 인격적인 존재로 자신들에게 오실 분으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 사도가 가르치는 부활의 도, 즉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헛된 도일 수밖에 없고, 자신들의 체제를 흔드는 이단적인 가르침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 등장하는 이들 모두는 현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부러울 것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우면 다른 세상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기라도 하겠지만 모든 것을 만족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렵고 힘든 사람이 예수를 잘 믿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의 도를 싫어하는 자가 우리 자신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지위와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내용 중에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11:47-48)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증거 하신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 점점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당시 지도자들은 이러다가 반역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만 보면 그들은 애국자 같고, 나라를 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로마 덕분에 잘 먹고 사는 자들이 되어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속하여 있는 교회이기에 다른 교회보다 잘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에 속한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교회를 위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열심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사용된 것입니다.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말씀이 응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라가 잘되어야 교회도 잘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드시려고 하셨다면 부활 승천하시지 말고 이 땅에 계시면서 확실한 사회변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여 지상낙원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신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다른 세상으로 옮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예수님이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3. 오직 복음을 위해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이들은 이 세상이 중요하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이 전부였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들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신앙체제를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예수님의 선포 자체가 이 세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천국이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이었기에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그들의 종교 체제와는 전혀 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로마와 타협하며 잘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의 기반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기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고 따라서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이유도 동일한 이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은 당시 제사장들이나,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라는 특정 인물로 국한 지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전부로 보고 그 세상에서 별 탈 없이 자기의 나라를 지키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이 전하여 진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는 개인이나 교회의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하나님이 우리 교회는 아무 일 없도록 잘 지켜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붙잡히고 갇히는 사도들의 얘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갇혔지만 사도들의 가르친 말씀으로 인해 남자만 오천 명이라는 많은 수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복음은 결코 쇠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안위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인해 고난에 처하고 어려움에 처한다고 해도 복음만은 결코 쇠하지 않고 그 능력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바른 태도는 복음 덕분에 자신의 안위를 꾀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만 전하면 교회가 부흥되겠지 라든가 복음만 전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겠지 라는 생각은 모두가 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일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산다면 평소에 복음을 말하다가도 그 복음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위태로워진다면 현재의 삶의 안정을 위해 복음을 포기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삶의 형통도 있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이 살아가는 삶의 체제를 거부합니다. 그렇기에 바른 복음을 전한다면 분명히 현재적인 삶의 체제에서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복음이 중요하고 천국도 소중하다고 하지만, 지금의 내 삶이 흔들리고 어려움이 오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내 교회가 아무 일 없이 잘되어지고, 내 삶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굳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내 삶을 흔들고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곧 사도들을 가둔 자들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복음은 결코 우리의 삶을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함으로 이 세상에 미련을 버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복음에 순종하여 오직 우리의 삶이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기적을 통해 성경에서 나타난 결과를 살펴보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까?
3. 우리가 부활을 좋아하는 까닭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부활을 말 할 수 있지만 부활을 싫어함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을 배척하고 복음 증거를 싫어하는 자들은 누구라고 합니까?
6. 복음을 전하는 자나 주의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바른 태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복음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성경에서의 복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