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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본문 / 고전 7:17-24

 

1. 갈등과 고민

언젠가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신다는 분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궁금해 하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질문은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든지 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서 잘 알고 있고 믿고 있지만, 요즘 같은 살기 힘든 세상에서 먹고 사는데 있어 이리 저리 치이고 해서 너무 힘이 듭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가진 아파트 가격이 너무 올라 주체를 못 하는데 믿는 우리는 너무 힘이 듭니다. 물론 그들 중에도 믿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성경은 “너희들이 있어야할 것을 다 아신다며 그런 것들은(먹고 사는 것)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시대적배경이 틀린 오늘 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지 쉽게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에게도 이런 고민과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천여 년 전에 하신 말씀이라 오늘날의 상황과 많이 다르니 오늘날은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마실 것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아는 약속처럼 하나님이 알아서 잘 챙겨 주시든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잘 사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이라 불렸던 사람들은 물질이 많은 부자로 살았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부자로 살아가는 현실이 좋아서 부활도 믿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눈에 보이는 가짜 현실을 믿음의 시각으로만 볼 수 있는 진짜 현실인 성경이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현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계가 진짜 현실입니다. 즉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이 진짜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도다”(눅9:58)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제자들의 속에는 세상 정욕과 자랑으로만 가득하여 예수님이 그들의 심령에 머물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받았던 대접입니다. 그것도 따르겠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원하심을 따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그나마 있다면 그것은 다 과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시원한 답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답답하여 집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 어떤 삶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먹고 살기 힘든 이때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뿐인데 어떻게 우리의 필요가 다 채워졌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좋은 것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생각이 드는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병든 사람은 고침을 받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지위가 높아지고, 윤리나 도덕적인 면에서도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괄시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소속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전서 1장부터 보아온 것만 해도 그런 내용들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놀라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되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데도 세상에서는 나에게 무언가 나아지는 것이 없는데 무엇 하려고 내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하기 때문에 십자가란 배타적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는 능력이 아니고 실패로 보이기 때문에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신이 육체를 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 미련하게 보이기 것이기에 배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도, 받을 수도 없도록 장치해 두신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인가 기웃거려보다가 십자가의 도를 이야기 하면 도망가게 되는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한번 신에게 빌어서 좋은 것을 얻고 싶었는데, 그 신이 가신 길이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자기의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다고 하시는 분을 따라 간다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라가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무언가 역전의 인생을 기대하면서 따라갔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아마도 예수를 믿고 따르면 이런 꼴이 난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에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입었다면 세상의 것으로 높아지고 성공하고 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31) 무엇이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나가는 세상에서 영원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그것으로 이미 복 받은 자이며,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안에 들어있는데, 그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안에는 이 세상에서 더 나음이라든가 발전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3. 할례와 신분

그렇게 오늘 본문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일들이 다 지나가는 그림자 같음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의 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할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는 그들의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반드시 할례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여도 반드시 할례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7:17-19)고 합니다.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복음을 듣고서 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해도 그 할례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즉 무할례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이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한 일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책망을 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유대인들에게는 이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이런 것으로 인하여 더욱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다시 율법을 지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다시 할례를 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의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아는 자 되었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그림자 같음을 말씀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종과 자유자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다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냐 아니면 부자냐 하는 문제는 아주 민감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는 돈을 잘 버는가, 못 버는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결혼 선호도를 보아도 나이와 외모 그리고 심지어는 이혼경력도 상관이 없고 오직 그 사람의 경제적인 능력이 최고로 나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인도, 교회도 무엇이 있어야 복 받았다고 하면서 큰소리치겠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다. 좋은 회사에 취업하였다. 승진하였다. 성공하였다. 부자가 되었다 하는 이러한 것들이 다 복으로 말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반면에 저주란 평생 말단 사원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자기 집도 한 채 마련하지 못하고, 취직도 제대로 못하고 사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목사로 치면 개척실패하고, 자기 건물도 하나 갖지 못하고, 평생 지하에서 겨우겨우 지내고 이런 것들은 무언가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그렇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들에게서 나오는 기도라는 것도 그 대부분이 ‘하나님 이것만 이루어 주시면 하나님도 영광이요 저도 보란 듯이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는 것들입니다. 어떻게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만 좋게 하려고 이루어 달라는 말이 아니라 다 하나님을 위해 이런 기도하는 것이니 들어주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무어라고 하고 있습니까? 20절입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0-24) 여기서도 한마디로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네가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평생 그대로 지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이란 노예입니다.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사용하라고 하는데 다른 번역에서는 혹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 사도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인간은 그 어떤 환경을 막론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막아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능력은 우리가 평생 종으로 살면서도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자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그 종이라는 자리도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된 엄청난 자유입니다. 다른 세상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입은 자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임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고 자유자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자요, 자유자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부르신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지만, 세상에서는 참된 자유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목에서 자유한 자로 사는 것이며, 사람의 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떤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주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그냥 지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 주께 기도했더니 그때 주께서 주신 응답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아멘! 우리가 처한 그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는 내게 족한 것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알고 믿는 자라면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며 그 자리에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꿈꾸는 것처럼 이 땅의 성공한 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주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어떤 형편에 있든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있는 그 자리와 형편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미도 허락하신 그 나라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름 받은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 삶을 통해 우리를 불러 세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가짜 현실과 진짜 현실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이 가는 길을 가려 할 때 예수님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예수님께로부터 부름을 입었다면 우리가 가지게 되는 세상에 대한 시각은 무엇입니까?

4. 세상의 일들이 그림자 같음을 할례를 통해 어떻게 말씀 하셨습니까?

5.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 엇입니까?

6. 세상의 일들이 그림자 같음을 종과 자유자의 문제를 통해 어떻게 말씀 하셨습니까?

7. 한마디로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그냥 지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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