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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잠시 지나가는 세상을 사는 우리의 신앙

본문 / 고전 7:25-40

 

1. 자족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은 어떤 환경으로도 막을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어떤 환경과 어떤 조건 가운데서도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주의 능력으로 주의 일에 동참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부름 받은 그 자리가 부름 받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곳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부르신 그대로 살려고 하면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과 형편을 동원하여 핍박과 고난으로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 첫 번째 핍박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가족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전세방에 살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이것도 과분하니까 자족하면서 감사하며 살자고 하면, 과연 어느 아내가 ‘여보! 당신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믿는 자의 신앙은 그래야만 합니다.’ 라고 공감하며 나올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아내나 부모나 자녀들까지 우리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무시하며 달려들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 회사는 항상 그 목표를 계속 상향조정하여 일하는 데 우리가 만약에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고, 만족하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과연 회사에 계속해서 붙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만약에 이런 사람이 교회에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오니 역시 해마다 새로운 목표를 세워놓고서 독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분이 어느 교회 주보에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과 상관없이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교회’라고 소개되어 있어서 그 교회를 찾아가 보았더니 교회 입구에 전도목표가 2만 명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돌아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더욱 더 남보다 많이, 크게 성공하기를 원하는 곳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보다는 사람들이 볼 때에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아지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나아진 삶이 우리의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르신 그곳에서 또 그 모습 가운데 주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충성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 높은 곳에 앉히실 수도 있고, 더 많은 것을 맡기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본질적인 삶을 놓치고 세상이 추구하는 비본질적인 삶을 위해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부유한 자와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진 자를 승리자라 성공한 인생이라 말하고, 반대로 가난하고 지위와 권세가 전혀 없는 자를 패배자라 실패자라 부르지만 하나님이 시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에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습니다. 또 성공자도 실패자도 없습니다. 오직 믿는 자만 있을 뿐입니다. 더 많은 맡은 믿는 자와 좀 적에 맡은 믿는 자만 존재할 뿐입니다. 높은 지위를 맡은 믿는 자와 그런 지위가 없는 믿는 자만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믿는 자들은 많은 물질도, 높은 지위도 자신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도구로 주셨음을 알기에 그것을 마치 자기 것 인양 자랑하거나, 그것으로 남을 무시하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름 받은 그 모습,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것으로 충성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있습니다. 언젠가 방송에서 어느 고등학교에서 직업선택의 십계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십계의 내용을 보면 이런 것입니다. 월급이 적은 곳을 택하라. 장례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거의 받을 수 없는 곳으로 가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는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9번째가 이런 내용입니다.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라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이 복음으로만 만족하겠다는 사람이 가야할 길과 삶의 내용과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복음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십계를 만든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십계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면,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쪽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주저하는 이런 곳에서 성공하여 인간승리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고진감래라는 것입니다. 고생은 되더라도 보람이 되는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인간의 의지나 결단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를 종말론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미 끝이 왔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이상적인 희망이든 꿈이든 간에 인간이 이루어 내어서 만들 유토피아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신 그대로 자족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하면 자족하게 되며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2. 말세의 신앙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31)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공동번역)을 보면 사라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외형들, 즉 이 세상이 모습들과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여기고,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아니한 자들처럼 여기고,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여기고,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렇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살고 있지 못하다면 왜 그럴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외형들이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나라를, 그 약속의 나라를 눈에 보듯이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 거의 대부분은 성경에서 그렇게도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여기서도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다는 것은 주의 영이 임하여야 됩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세상의 종말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어느 정도로 자족하였는가는 빌립보서4장에 보면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 사도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요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합니다. 일체의 비결을 알았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 보면 심지어 빨리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살기가 괴로워서 빨리 죽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 그 십자가로 완성된 나라가 너무 좋아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아서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신앙이 부러워야 할 자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면 전부다 쉽게 이해가 되고,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입니다. 처녀 딸이 있느냐 내 생각에는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임박한 환난이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멸망일수도 있고, 로마의 핍박일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은 온 세계의 멸망의 모델로 보아도 됩니다. 그 때의 환난에 대해서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24:15-20)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들이 도망하기 힘 드는 것입니다. 저는 전후세대라서 그 비참함을 모르지만 기록을 통하여보면 그 전쟁의 비참함에 대해 알 수가 있습니다. 북에서 피난을 내려 올 때 인민군이 지키고 있어 몰래 지나와야 하는데 어린애가 갑자기 울게 되자 그 어린애의 입을 손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런 이야기를 한 번쯤은 다 들어봤음직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전쟁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마음으로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 하십니다. 그러니 재림의 시기를 알아서 준비해야만 합니다. 물론 그 재림의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종말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세라는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의 모든 삶을 말씀한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오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다시 오심이 가신 그 다음 날이 될 수도 있고, 몇 천 년 이후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을 마지막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것이 말세의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이 이미 종말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질 줄 모르는 것이기에 예수님이 승천 이후부터는 바로 종말이 되는 것입니다.

 

3. 보물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든 제자들이 처음에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따라 갔습니다. 예수님이 높아지시면 자기들도 한 자리 하고자 서로 누가 높으냐며 시기질투하며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세상의 끝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의 끝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원했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 세상의 외형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에는 두려워서 도망간 관원들 앞에서 큰소리를 치게 된 것입니다. 관원들이 제자들을 잡아서 협박하며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의 끝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여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라질 것들을 붙들고 있으면 그것들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중요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결혼하여 있는데 이혼하라는 것입니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 때는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며 오직 주만 기쁘게 하려 하다가 이제 결혼하게 되니 어찌하면 아내와 남편을 기쁘게 할까하여 그 마음이 나누어질 수 있으니 그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별을 했는데 꼭 결혼을 해야 하거든 주 안에서 해도 상관은 없지만, 차라리 그대로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외형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7:32-35) 이 세상의 외형이 지나가는 것이기에 세상에 일들이 마음이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이 살아가는 일에 큰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인륜지대사라 하여 관혼상제 즉 성인식, 결혼, 초상, 제사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조차 종말에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고 하니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겨두라고 하십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외형들에 너무나 많이 우리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외형들을 보물이라고 여기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거기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 마음이 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우리의 신앙을 이 말씀 앞에 세워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을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1-6)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사라질 이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있는 하늘의 것을 찾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평생에 이런 종말론적인 삶의 열매들이 우리의 모든 삶에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도 나타나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부름 받은 자들에게는 승리자와 패배자 없이 오직 믿는 자만 존재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2. 직업 선택의 십계명의 의도와 복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 이 세상의 외형은 다 지나가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어떻게 살며, 무엇을 구하라고 하십니까?

4. 바울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가 말세이고 종말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제자들이 자신들이 두려워했던 관원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하는 종말론적인 신앙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8.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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