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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위하여

본문 /  고전서 8: 7-13


1. 인간의 행동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에 끌려 행동하는가?”하는 이런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도대체 왜 행동하는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도 다 행동하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에 끌려서,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오기 싫을 때도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까? 자꾸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가 다 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렇게 질문을 하면 답하기가 곤란해지고는 합니다. 어느 책에서는 인간들이 하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이렇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고통을 멎게 하기 위하여,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생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안락의 욕구를 추구하기 위하여” 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들도 이 네 가지 경우 중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는 것, 흔히 하나님의 일이라고 또는 거룩한 일이라고 하는 이런 행동들도 이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이런 것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시간이라서 점잖게 앉아있지만 만약 배탈이 나서 배가 아프기라도 하면 이 자리에 점잖게 앉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 고통이 멎고 해소하는 방향으로 우리 몸이 행동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장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행동을 합니다. 돈을 저축하거나 아니면 수입이 될 만한 곳에 투자를 하고, 심지어는 좀 더 먼 장래인 사후의 두려움 때문에 종교를 가지거나 착한 일을 차곡차곡 쌓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 보다 더한 욕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존 욕구입니다. 생존권의 문제가 인간들에게는 가장 절실한 행동동기가 됩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 하는 말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라고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존욕구가 채워지면 안락의 욕구, 즉 문화적인 혜택 같은 것들을 누리고자 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 인간이 만든 최고의 학문이라는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행동을 하는데 인간이 한 그 행동이 또한 반드시 행동을 한 자기에게로 회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수되면서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최고다”라는 자기 가치의 우선성을 담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인정받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행동에는 남에 대한 배려가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혹 배려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해도 인간은 그 행동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괜찮고 좋은 사람인가를 드러내고 싶을 뿐이지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행동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행동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행동의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을 깔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설교시간에 성경이야기만 하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묻고 싶으신 분은 이런 마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가 있는데 무엇을 하라는 것을 하면 복을 받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저주를 받으니 목사님이 성경을 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저주를 받지 않고 복을 받게 되는지 이야기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결국은 행동의 주체를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설교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결국은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두고 자기를 위해 행동하기에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어떤 행위도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것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2. 약한 믿음

바울이 고린도서를 보낸 고린도 지역은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입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모든 일이 시작 되는 곳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시작 하려고 할 때,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지내고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차를 사도, 집을 지어도, 개업을 해도 고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 고사를 지낼 수가 없어서 목사님을 모신다는 형식만 다르게 할뿐 어찌 보면 그 뜻과 의미는 같은 내용으로 예배를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단지 개업을 하니 장사 잘 되게 해 달라거나, 집을 새로 이사했으니 복이 들어오게 해 달라는 것이면 곤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제사와 형식만 다를 뿐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하는 것은, 그곳이 사업장이든 또는 집이든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선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업장의 주인도 내가 아니고 나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게 맡기셨음을 믿기에 그 맡기신 이의 뜻대로 운영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고린도 지역의 우상숭배와 그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고린도지방의 모든 이들에게는 일상적인 생활이었습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짐승을 잡아 바치는 것입니다. 신이 먹지 못하니 제사장들이 고기의 일부를 차지하고, 제사를 드린 제주들이 고기의 일부를 받고, 함께 먹기도 하고, 여분의 고기들은 시장에 내다가 팔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지역의 대부분의 고기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 것입니다. 이런 우상의 제사에 참여되어진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바울 사도의 답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먹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기에 참 신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나 땅에 수많은 신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 인간들이 만들어낸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니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대단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아무나 받지 못하는 놀라운 지식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자기가 알고 행하는 그 행위를 통하여 자기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것도 먹지 못하느냐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8:7) 이런 지식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직도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아직도 그런 지식에 이르지 못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그 제물 자체가 더러워져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상의 음식을 먹으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먹으면서도 양심상 가책을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고전8:8)고 합니다. 음식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제사 음식이라고 먹지 못하는 것을, 나는 먹을 수 있다고 해서 그 먹음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만들지 못하며, 하늘의 것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먹는 사람은 나는 지식이 있어서 먹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그 식물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로마서 14장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3-17) 식물 자체가 속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상의 습관이 있는 사람에게 속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물로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씀을 우리는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형제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실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고 하는 것입니다.


3. 행동의 주체

우리는 인간의 행동은 무엇을 하여도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하여 한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씀합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 권리를 약한 형제를 위하여 다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도 또다시 내가 나의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는 ‘그래 내가 절제해야지’ 하면서 스스로를 다짐하고 격려하면서, ‘나는 이렇게 연약한 형제를 위해 나의 자유를 다 쓰며 살지 않았으니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또 자기 자랑으로 돌아가면 곤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 때문이냐를 다시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으로 인하여 연약한 자가 시험에 들게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형제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나와 형제 말고 제 삼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8:10-12)고 합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의 말씀처럼 그 식물을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 식물이 속되기에 지식이 있는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고 하여도, 연약한 사람은 자유 함 없이 그런 우상의 제물에 참여하게 되어 양심이 약하여진다면 그것은 그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이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이 약하여진 그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양심이 약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방 신들의 세력으로부터의 내적 자유가 아직 그렇게 단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상 제물의 고기를 먹으면서, 자신들이 믿음을 배반한다고 하는 양심의 가책을 가지며, 다시금 우상의 지배 아래 빠진다고 하는 염려에 쌓이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상 제물 고기를 먹는 그것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 중대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 즉 믿음이 약한 자를 옳지 않은 길로 인도하여, 그가 바른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거나 바른 신앙을 시인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되며, 그 사람은 강한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만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관계를 잘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분을 보게 됩니다. 그 형제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각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조건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를 위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모든 지식이 있어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연 덕을 세우는 것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형제를 위한다면 나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며 또한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된 내 곁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지체된 그 형제가 실족치 아니 하도록 내게 허락 되어진 지식을 나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체를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누가 옳으냐 그르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옳지 못한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이제 사람을 보는 관점이 나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눈에 들보가 먼저 보이지, 형제의 눈에 티가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하며, 그 은혜를 매일 맛보아 알 수 있는 우리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자기 자랑이 깔려 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개업이나 집을 샀을 때 하는 제사와 하나님께 하는 예배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3.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도 형제를 실족케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지식을 가진 자들의 잘못된 지식은 무엇입니까?

5.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이 상하게 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6. 우리가 가진 성경의 지식이 우리에게 바른 믿음이라면 나타나야 할 증상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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