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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직 복음을 위하는 바울의 변명

본문 /  고전서 9: 1-15


1. 바울의 삶

우리는 지난주에 세상의 사람들은 다 자기를 위하여 행동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행동하지 않고 지체된 형제를 위하여 행동해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지식이 신앙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진정한 신앙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에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형제를 위하여 그렇게 하면 나중에 나에게 보상이 있겠지 하는 의도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 형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샀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 형제를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권리마저 평생 포기하겠다는 것이 바울사도의 신앙이며,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형제를 위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오늘 말씀에 보면 복음을 위해 그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위하여서라면 자신이 바보가 되어도, 고생을 해도, 죽어도 좋다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배설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귀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다 자기 자랑이요, 자기 치장이요, 자기 영광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율법을 열심히 지켰는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만큼 철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지킨 것이 자기를 위하여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것이 다 자기 영광이고, 자기 의이고, 자기 자랑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까지 귀하다고 여겨온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하여 열심히 살게 되었다고 하니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율법에 열심을 내던 바울이었기에 복음에도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마치 절에 열심히 나가던 사람이 교회로 나오게 되면 역시 열심히 나오게 된다는 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위하는 열심이 또다시 바울의 열심이 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은, 그의 열심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고서도 바울의 고백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 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자기가 비록 순교할 지라도 자기를 증거 하거나 자랑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2. 바울의 변명

그런데 그랬던 바울이 왜 오늘 말씀에는 자기의 사도됨을 변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하여 변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도로 인정하지 아니하면 자기가 증거 한 복음마저 부인하게 될까봐 변호하는 것이지 자기를 사도로서 대접을 잘 해달라는 변호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고전9:3)라고 합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사도를 향하여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를 고린도전서 7장에서 보았던 결혼문제의 경우를 보면 이런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안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바울은 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고 영혼이 구원을 받았는데 몸이야 어떻게 한들 괜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적으로 사는 것을 보니 아직도 믿음의 지식이 부족한 것 같은데 그런 바울이 과연 사도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식입니다. 또한 우상 제물에 대해서도 바울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무엇이든지 먹을 자유가 있지만, 형제를 위하여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우상 음식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입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10:20-21) 이렇게 말을 하니까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바울은 은 우상에 대하여 지식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무슨 사도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뒤에도 보면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20-23)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모습으로,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의 모습으로,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행한다고 하니 고린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줏대도 없고, 일관성도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글에는 힘이 있으나 사람을 직접 만나면 외모도 시원찮고 말도 시원찮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예, 저래도 예, 하는 예스맨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압도할 만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시하고 깔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서 사례도 받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사도가 아니기에 당당하게 사례도 달라고 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이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당당하게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바울은 그런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사도가 아닌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정말 그렇게 여겼는가 고린도후서 11장을 보겠습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후11:5-9)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이런 편지가 오고 가는 것을 보며 바울사도를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사례를 받아서 고린도교회를 섬긴 것이 죄를 짓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도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으니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과연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앞의 4절입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 하는구나”(고후11:4) 바울 사도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음에도 자신을 다른 사도들과 같이 대접을 해 주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무시하고,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에 대하여 바울이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대접을 받아도 상관이 없지만 복음이 왜곡되는 일은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정말 부끄러워집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변명할 때에 하는 그 변명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위한 것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변호할 때에 과연 그것이 복음을 위한 변호인지 아니면 자기 정당성과 자기 자존심을 위한 변호인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사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면 우리는 아마도 화병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다 죽었을 것입니다.


3. 복음을 위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고전9:1-3) 바울 사도는 자신은 종이 아니라 자유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남의 종이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에 종이 된 것은, 자기 목회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바울처럼 복음을 위하여 고린도교회의 종이 되어 자기의 자유를 사용하지 않으며 목회를 한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목회에 성공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을 덮고, 얼굴에 철판 깔고, 목소리도 걸걸하게 해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잘 바쳐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해야 그럴듯하게 들려질 것입니다. 주의 종에게 잘해서 복 받은 사람과 잘하지 못하여 저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 목회는 좀 더 편해지고 성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들의 연약함과 악함을 보게 됩니다. 선의로 대하는 자는 무시하고 도리어 당근과 채찍 그리고 축복과 저주를 휘두르며 대하는 자에게는 굴복하게 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바울사도를 보고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은 사도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사도라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고,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의 사도로 임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해야만 하는 바울사도의 심정이 느껴지시느냐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사도인 증거가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도라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확증하는 도장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나를 향하여 힐문을 하고 있으니 나의 말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도로서 마땅한 자유와 권리를 사용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다른 사도보다 부족해서 요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5-14) 다른 사도들과 베드로처럼 자기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나 일하지 아니할 권한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군사가 자비량하고 다니겠느냐, 포도를 심고 과실을 따먹지 않겠느냐, 양떼를 기르면서 그 젖을 먹지 않겠느냐, 사람의 예대로 말하지만 율법에도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에서 일 하는 자는 성전에 드려진 것을 먹고, 주님도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일하는 자가 제 먹을 것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9:15)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알아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라도 마땅한 사례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이 말을 쓰는 것은 이제부터는 자신에게 이같이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자신의 복음에 대한 자부심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자신이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사도답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복음이 손해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함으로 인하여 내가 자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 안에 이 마음, 즉 복음을 위하는 이 마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내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더라도 그것으로 섭섭함으로 변명하기 보다는 오직 복음을 위해, 그 복음이 손해를 볼까봐 변명했던 바울의 이 마음을 잘 헤아리셔서 우리에게 허락한 이 복음이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통하여 듣게 되는 모든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신앙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향하여 사도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바울이 여러 모양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그들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복음을 위하여서는 어찌되어도 좋다던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우리의 변명과 바울의 변명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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