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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유인의 목표와 방향

본문 / 고전 9:19-27

 

1. 자유

오늘 설교 제목을 보면 자유인의 목표와 방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자유인이라면 목표가 없어야 참으로 자유인다운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유인인데 그런 사람에게 목표가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참으로 자유하면서도 아주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고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종으로 매일 이유가 없는 자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어서 로마의 법에 의하여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의 종이 될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참 이중 국적자의 병역문제로 시끄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모들이 아기를 낳을 때쯤이면 원정 출산하여 미국시민권을 가지고자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미국시민권을 얻어 국적을 포기하게 되면, 국방의 의무인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면에 어떤 사람은 외국에서 태어나 계속 살아왔던 사람이기에 그래서 국방의 의무가 전혀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겠다고 군에 지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보다 자신의 뿌리인 조국이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서 종이 된 것입니까? 지금 이야기 한 것처럼 자기 조국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시민권이 있는 로마를 위한 것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위하여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자유자 바울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0-22) 유대인 즉 율법 있는 자들과 율법 없는 이방인들 그리고 약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들을 대할 때에 그때그때 달랐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이미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율법의 의무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셨음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어 졌기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율법의 요구나 정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있는 자와 같이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입니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16:1-3) 디모데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버지가 헬라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즉 율법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는 그렇게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것으로 그들을 대한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갈라디아서 2장에는 보면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갈2:3-5)고 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한 바울이 여기에서는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지 않습니다. 거짓 형제가 들어와서 복음으로 자유하게 한 형제를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기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다시 11절부터 보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1-14) 바울이 게바, 즉 베드로를 책망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고 있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식사 하다말고 떠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행하자 남은 자들도 베드로를 따라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유대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잘 안 되는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약한 자가 있다면 그런 자에게 자신은 더 약한 자라고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것밖에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가장 속 시원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교회 안의 지체된 성도들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만하면 믿음이 그렇게 없느냐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아서, 성경 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반응이 나오니까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약한 자들에게는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다가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자유 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3. 목표와 방향

그럼 자유자인 바울에게 있는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살펴보면,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22-23)고 합니다. 어떤 목표와 방향입니까?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과 복음에 참예함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이 복음으로 되는 것이기에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이라도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가 나오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복음에 참예함을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유인이지만 그 자유를 사용하는 방향과 목표였습니다. 바울의 목표가 복음에 참예함이라고 하니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복음에 참예한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생각에 바울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복음에 참예하려고 하고 또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두려워한 것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바울의 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신 것이기에 그 선택과 부르심에는 후회나 실수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있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4-27)는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운동장에서 달리기 하는 자가 많을 지라도 상 받는 자가 한 사람이듯이 너희도 상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한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운동도 절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지역에는 2년에 한 번씩 운동경기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선수들이 약 10개월 전부터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 시합에 이기기 위하여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 보디빌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20년 넘게 보디빌더로서 엄청난 훈련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음식절제라고 합니다. 운동이 2라면 음식절제가 8이라고 합니다. 좋은 근육질을 유지하기 위하여 맛없는 닭 가슴살과 야채종류로만 식사를 하고, 기호식품들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보디빌더의 성취감이 무엇이냐고 하면, 바벨을 들어 올리는데 5킬로그램을 더 들어 올리는 것과 어제보다 더 커진 근육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키운 근육이 영원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썩을 것입니다. 그가 받은 상패와 트로피들이 영원할 것 같지만 결국은 썩을 면류관인 것입니다. 이 땅의 썩을 면류관을 위하여서도 그렇게 절제하면서 훈련을 하는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위하여 절제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도 운동하는 자처럼 달음질하지 않으면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아니 방금 자유인이라고 해 놓고서는 자유인은커녕 절제하는 운동선수들보다 더한 절제와 훈련을 하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자유인인가’ 하는 반발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제하지 않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상을 받지도 못하고 마치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한다고 하니 이게 무슨 자유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열심히 해서 상도 받고 구원도 받자는 식이 되어 버리면 그게 무슨 복음인가’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권면과 말씀은, 상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상을 주셨고, 이미 구원을 베푸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이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복이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며,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며,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3장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4-19) 에스겔 선지자는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보좌에서 생수가 나와서 그 생수가 가는 곳마다 살려내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 물이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고, 그 다음에는 허리를 적시고, 나중에는 헤엄칠 큰 강으로 흘러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은혜의 강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금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은혜를 맛본 것입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독려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상인지 그 세계를 맛보았기에 죽도록 달려가도 그 은혜의 세계를 다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상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 상의 은혜를 다 맛보지 못할까봐 달리는 것입니다. 바울의 상은 복음을 위해 자기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자기의 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져 그리고 그 사랑에 붙들려 살아가기에 다른 보상과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많은 시간을 그 사랑에 붙들려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자유한 사람의 목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삶을 통해 자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권리를 대가 없이 포기하게 하는 권리 주장에서의 자유와 가진 힘을 남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게 하는 세력 다툼에서의 자유 그리고 봉사하기 위한 자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 봉사에는 서열이 없는 봉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가 바울사도에게서 그대로 다 나타납니다. 씨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큰 자인가 하는 문제는 오직 하나 ‘누가 십자가를 졌는가?’로 마무리 해버립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그 복음에 사로잡힌바 된 그 세계가 얼마나 좋은지, 그 자유가 얼마나 좋은지 그 붙잡힌바 된 그것, 자기를 사로잡은 복음을 향하여 평생을 달려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달리는 것이며, 우리에게 함께 달리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제 결정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미도 허락하신 상을 모두 맛보아 알 때까지 멈추지 않은 그 경기에 동참할 것인지 아니면 만족하고 포기할 것인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함께 달리시기를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을 이 경기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3장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0-14)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도 이 자유를 마음껏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 소원함이 있다면 이미도 허락하신 그 사랑과 은혜의 맛을 우리의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놓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맛보아 알 수 있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더 맛보기를 원하신다면 그 자리에서 만족해하지 마시고 주신 자유에 대한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알아 진정한 자유자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도 바울이 진정한 자유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종이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율법 있는 자와 율법 없는 자에게 대하는 바울의 태도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3. 우리가 약한 자를 대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바울이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상대방에 맞춰서 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바울이 신앙을 운동 경기에 비유하면서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6. 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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