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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노라

본문 / 고전12: 1- 3

1. 종교성과 체험

지난주에 성도란 주의 죽으심을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증거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성경에 많고 많은 이야기들 중에 왜 꼭 주의 죽으심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더 나아진 우리들의 모습이나, 예수님을 믿고 받은 여러 은사와 복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보암직한 일들도 많이 있는데 왜 그런 무거운 십자가의 이야기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모습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반드시 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죽으심, 즉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 1장에서 이미 사람들은 다 십자가를 싫어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지혜롭거나 아름답거나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 하며, 그 십자가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능력과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십자가라고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면 그만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 1절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12:1) 바울 사도는 신령한 것에 대하여서 이중부정으로 말함으로 굉장히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꼭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렇게 알기를 원하는 그 신령한 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들이며, 그 성령의 은사들에 대하여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당장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그래 나도 은사를 받아서 많은 능력을 행하여야 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미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은사가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 까지만 하시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믿고 가야 되는 것이라는 게 아니라, 그 믿는 것 까지도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은, 마치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종교적인 체험을 가진 것을 가지고, 그 체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사는 모습과 같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어디에서나 초월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고린도 지역은 헬라의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보기도 하고 경험하기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체험에는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 끌려들어가서 방언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신적인 능력으로 보았기에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만 아니라 오늘날같이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고 찾아 나섭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종교적인 것을 과학과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다 드러나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을 의지하여 황홀경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동양의 낮선 종교를 찾아 나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경함하지 못한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많은 사찰에서 산사체험이라는 관광 상품이 개발되어 외국에까지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의 조용한 사찰에서 며칠간 수련을 하면서 자기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많은 돈을 들여서 한국의 산사까지 찾아오는 것은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종교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성들이 교회 안에서도 어떤 신비한 체험 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거나 또는 방언을 하였다는 것으로 자기들은 대단한 신앙을 소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가서 특별한 경험을 하고서는 그것이 진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들이 성령의 일인지 아니면 악령의 일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처럼 자기 마음에 좋고 안 좋고, 와 닿고 아니 와 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한 주 안에서의 바른 기준이 우리 가운데 서야 하는 것이기에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우상과 진리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라고 합니다. 참으로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서는 이방인들이 신령하다고 여기는 것, 신비하고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도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만 모든 종교에는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무슨 능력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전12:2)고 합니다. 우상이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 우상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우상이 끌면 끌려 다녔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딱 꼬집어서 말은 못하는데 그곳에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배후에 바로 악한 영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한 영이 여러 가지 신기한 능력들을 나타내어서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혹에 끌려 다녔던 자들이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1-2)고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상태일 때에 우리는 이 땅의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러니 악한 영이 끌면 끌리는 대로 우리는 따라갔던 것입니다. 무언가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이 나타나면 대단한 신의 능력이 나타난 것으로 알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의 임함이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를 성경은 잘 경고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입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9-12)고 합니다. 사탄의 활동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거짓 것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여 하심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표적과 기사를 따라가는데 그 진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여 주셨습니까? 최종적으로 이 땅에 남기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생애가 무엇을 위하여 기록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보는 사복음서가 무엇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예수님의 청소년기도 아닙니다. 마지막 3년 공생애기간이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은 십자가를 향한 길입니다. 제자들에게 거듭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는, 세상의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비록 고난이 따른다고 하여도 그런 고난쯤은 나중에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면서 견뎌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삼년이나 고생하며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그런 제자들마저 다 돌아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실패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은 죽음이기에 더욱 더 실패로 본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면서 일말을 기대를 가진 사람들조차 나무에 달려 힘없이 죽은 예수님을 보고서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구나 하고서 돌아서버린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이 말씀은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나무에 달려 죽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서 두 가지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보고 저주 받을 자라고 하든지 아니면 주라고 고백하든지 둘 중의 한 가지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3. 신령한 것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에게 알게 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신령한 것인지, 무엇이 참된 성령의 은사인지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이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이란, 종교적인 초월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느냐가 바로 신령한 문제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기적이 없으며, 이 보다 더한 표적도 없습니다. 다른 종교적인 표적들과 기적들과 초월적인 것들은 마귀들도 얼마든지 흉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로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 즉 성령의 은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은 바울 사도에게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고린도 교회 안에 파당이 생겼을 경우에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누가 십자가를 졌는가 하는 말씀으로 해결합니다. 십자가를 지지도 아니한 자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파당을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바울의 대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모든 문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해결하는 것입니다. 은사의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로 판단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하게 하시며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은 초보단계이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는 것은 고급한 단계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더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2장의 여러 은사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를 말하며 그러한 은사를 몸을 위하는, 즉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입니다. 13장에서 말씀하는 사랑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말씀합니다. 14장의 은사도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신령하게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다 이루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은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믿지 못하기에 은사를 주셔서 믿게 하시는 것인데 오히려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하여지고 자기들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은 십자가의 길과 반대로 거꾸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에게는 열광적인 분위기나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적이 없지만 그냥 묵묵히 마치 바보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주로 믿고 가는 것이 참으로 신령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만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신 표적임을 믿고서 오늘도 눈에 보이는 어떠한 기적적인 것이나, 몸으로 느끼는 체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진정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며,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들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만 바라보십시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언제나 동일하게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일하시는 그 열심의 주를 바라봄으로 우리의 매일의 삶이 주님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에게 은사가 나타난 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2.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신비하고 초월적인 현상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오늘날 우리가 신령한 것과 주 안에서의 바른 기준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사탄이 우상을 통하여 하는 일은 무엇이며, 참 진리는 무엇입니까?

5. 사도 바울은 신령한 것을 무엇으로 분별한다고 합니까?

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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