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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늘 권세 아래 사는 우리의 삶

성경 /  요17: 2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되는 말씀들은 어떤 표현들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깊은 내용들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1절의 영광에 이어 오늘 본문인 2절에서는 권세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권세는 영광과 영생의 사이에 있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셔서 우리들이 가지는 권세란 어떤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정리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 권위

보통 권세라 하면 일종의 권위와 힘이 합하여진 단어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권위라 하면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자유를 이 권위에 반대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권위라는 말 속에는 일종의 독재성이나 폭군적인 요소를 연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7-80년대에 많은 데모를 하였는데, 그것이 정치든, 사회적인 것이든 무조건 다 걸고넘어진 것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긴 하지만 결국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라고 인정되는 것은 어떤 성역도 없이 공격의 대상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나 종교도 그런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권위적인 것이 먹혀 들어가는 때가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들을 싫어합니다. 예전에는 권위적인 목소리로 아나운서가 방송을 하고, 목사가 설교를 해야 뭔가 듣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어느 틈엔가 우리들도 자유의 물결에 영향을 받아 강대상의 호화로움도 거부감을 갖고, 예배당을 너무 멋있게 짓는 것도 싫어진 이런 반 권위적인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권위를 가진 자들이 그 권위를 개인적이고도 편협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에 권위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속박과 피해를 당한다는 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권위에 대한 반대말이 자유라고 인식되어진 것입니다. 원래 권위라는 말은 힘이나 세력보다도 지식이나 지혜라는 말과 훨씬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물으면, 대부분 실컷 놀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놀게 해주면 얼마 못가서 심심해합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놀고 싶다는 말은 무슨 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 하는 공부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하지 않게 되자 그 다음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삐뚤어진 단면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모두가 돈에 마음을 빼앗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우리에게 10억의 돈을 준다면 무엇을 하겠냐고 하면, 안타깝게도 돈이 생기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일은 잘 못합니다. 우리들은 주의 일을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바쁜 관계로 못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의 여유가 생겨도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시간의 여유를 위해 5일 근무를 하지만 우리 사회는 더 퇴폐한 쪽으로 속히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일 근무가 좋다고 하는 것은, 지금 일에 시달려 피로와 고통을 느끼는 입장에서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을 많이 주기 위해 5일만 일하게 했더니 퇴폐와 타락을 가속시켰을 뿐이었습니다. 인간은 범죄 한 이후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결코 스스로는 제대로 사용할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주시면 반드시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 부모나 선생님을 먼저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위험한 죄성을 지닌 인간들에게 부모님과 선생님을 주셔서 그 밑에서 배우며 자라게 하시는 이 일이야말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어느 모임에서나 어른은 대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어른을 대접해야 합니다. 그것을 할 줄 모르면 무지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이상주의자이지만 나이든 이상주의자는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이상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그가 기대하고 신념으로 갖고서 결심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때려야 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녀를 절제 속으로 몰아넣어야 할 필요와 구속해야 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자유를 외칩니다. 그러나 나중에 커 보면 부모가 우리에게 가르친 식사하는 예법과 인사 잘하는 것 또는 하기 싫은 공부를 끝까지 하게 한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의 구속력 있는 강력한 처사들에 대해 고마움을 잊지 않게 됩니다. 본인이 아직 경험이 없고 철이 없어서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 쪽에서 강요할 수밖에 없는 그런 수준의 힘과 지혜를 성경에서는 권위라고 하는 것이고, 이것이 참된 권위의 본래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2. 권위자이신 예수님

그러나 우리 인간은 타락한 이후 각자가 신이 되어 살고 있기 때문에 이 권위 앞에 머리를 숙일 줄 모르는 존재들 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언제나 책임을 상대방에게 미루고 권리는 자기가 갖겠다는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이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과 개인과 개인 간의 분쟁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할 수만 있다면 책임을 전가 시키고, 권리를 뺏을 수 있는 힘들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과 지위를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하고 게으르며 완악한 죄성을 품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지키려면 누군가가 간섭하고 정당한 선을 그어서 결국은 그것에 승복하고 항복하여 우리 모두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힘과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참된 권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권위가 우리 인간들에게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오로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 있을 뿐이지, 무엇을 위한 자유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권위를 가질 만큼 지혜롭지 못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그 권세를 주님이 가지셨다는 선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권세를 가지신 것은 우리를 압제하여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받은 권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 있게 되므로 누리게 될 엄청난 복과 약속들에 대해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확실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순종이 있었기에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원하시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만민을 다스리는 권위의 자리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이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여기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며 중보 하는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지만 또한 분명히 세상의 권세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분 나는 대로 그 권위를 행사하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만 하여 보통은 그 권위자에 대해 불신과 반발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기에 이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으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입니다. 우리와 같이 굶주림과 목마름과 피곤함 그리고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똑같이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 역할을 하실 수 있으며, 다스릴 권한을 가지실 자격을 갖추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위에 군림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올라가신 것도 결국은 우리를 위해 그 보좌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일의 완성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 일을 맡을 만한 실력과 경험을 갖춘 예수님을 대표로 뽑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위해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중보하실 수 있는 자격과 실력을 갖추신 분이시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위에 권위를 가지셨다는 것은 세상에서처럼 귀찮고 싫은 일이 아니라 기뻐하고 환영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되 무조건 우리 편을 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야 되는지를 가장 확실히 알고 계시기에 그리고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해 우리를 위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3. 권위자 아래 우리

히브리서 5장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5:7-10)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과 화목 되게 하는 일을 하는 중보자인 동시에 또한 모든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 모두가 좇아야 할 삶의 모습이며, 하나님 앞에서 합격점을 받으신 생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이 걷는 길을 다 걸으셨기에 이 길이 어떠한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권위자가 될 수 있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 된 우리들은 자녀들을 잘못 가르칠 때가 많습니다. 옛날에 고생하던 시절을 생각해 일종의 보상심리로 내가 못 먹었던 것을 자식에게는 실컷 먹이고, 내가 못해 본 것을 자식에게는 마음껏 시키며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다 버렸습니다. 체격은 좋아졌지만 인내가 없고 끈기가 없는 애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진리와 목표를 못 가진 사람들이기에 자녀들을 제대로 키울 줄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자녀들을 그 모양으로 밖에는 못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것 외에는 격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실제적으로 갖고 있는 목표와 가치관이 허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보좌 우편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처럼 실력도 없으면서 권세를 가진 자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야말로 참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주님이 가지신 권세가 무엇이며 그 권세가 어디에 사용되어야 하는 지를 마태복음 28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모두 가지셨습니다. 우리를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래서 제자들이 편했다는 기록이 성경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핍박과 반대가 있었으며 순교까지 당하게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의 바울의 생애를 보면 한 번도 편한 날이 없었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파선에서 일주야를 깊음 속에서 보내며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춥고 헐벗고 굶주리고 한 번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이가 항상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목표를 가졌기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자로 세우시려고 지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목표를 내세우기 때문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를 받고 난 이후에 이제 세상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목표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날이 얼마나 많은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혼동과 고통 속에 빠져 신앙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씀을 근거로 분명히 눈을 떠야 합니다.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목적하며 살아가야 할 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말씀만큼 신나는 약속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선도 우리의 욕심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야 말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손길 아래서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자가 되었기에 세상에서 참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많은 실패를 겪었고, 신앙 때문에 좌절과 자존심 상하는 경험을 했을 지라도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결코 실패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좌절할 수 없는 영원한 승리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이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권세와 사랑을 근거로 하여 이런 고백이 결론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아멘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지금 우리를 무엇이 슬프고, 억울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직도 거짓된 목표와 허황된 욕심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의 권위 아래 있는지를 보셔서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나아가는 인생이 되었음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기적과 감사와 찬송으로 내 인생의 방향이 잡히고 궁극적인 승리의 목표가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생활과 책임인 동시에 권리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 놀라운 권리를 잊지 마시고 사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생각하는 권위에 대한 생각과 권의의 본래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세상의 권세 자들과 우리의 권세 자이신 예수님의 점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권위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함께 하심에도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믿는 자들인 우리가 실패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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