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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살려주는 영으로 사는 자들의 삶

본문 / 고전15:35-49

1. 부활

지난주에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바울의 고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그 고백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면서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한 주간을 돌아보며 우리는 나 자신을 살리고 높이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해 오지 않았는지 점검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의 기준이 과연 주를 위하여 예스와 노를 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행동한 것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아마 그 물음에 우리는 우리도 놀랄 만큼 나 자신을 위해, 나를 살리는 방향으로 살았던 시간과 결정이 많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히브리서 2장의 말씀으로 그 대답을 찾아볼까 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4-15) 예수님께서 혈육에 함께 속한 자로 오셔서 죽으신 것은 사망으로 사망을 없이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삯은 사망이었기에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그 죄의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하여 사망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일생동안 죽기를 무서워하며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를 해방시켜 생명의 종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어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예화가 나오면 눈이 반짝거리다가도 ‘예수님’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하게 눈이 풀리고 생각이 요동치고 행동이 흐트러지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 한번쯤은 경험해 본 일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까지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그런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영들의 방해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방해하고 싫어하는 존재들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선포되어 질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심이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며 진짜 현실인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에 심판받고 멸망 받을 곳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까지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심이 없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의 살과 피를 증거 해야 할 교회가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관심이 있다면 성탄절 같은 축제 분위기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성탄절이 흔히 말하는 생일이라면, 주님의 죽으심은 장례식입니다. 지난주 전도서에서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7:1-2)고 하셨습니다.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이 좋다고 세상에서 살려고 바동거리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사망의 종인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첫 열매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어떻게 살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35-41) 식물의 씨앗을 뿌려서 자라게 되면 완전히 다른 형체로 나오는 것을 예로 들어 부활을 말씀합니다. 사과씨앗 하나를 뿌려서 그 씨앗이 죽으면 사과나무가 나오게 됩니다. 전혀 다른 형체가 나오는 것을 예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아닌 동물도 육체가 다르다고 합니다.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가 다 육체이지만 같은 육체가 아니듯이 부활의 몸이란 세상의 육체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부활의 몸이 얼마나 영광스러울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은 후에 마치 무슨 유령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늘에도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형체가 따로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부활의 몸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땅에 속한 영광만 보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보여주시지 않고 성경에서 몇 사람에게만 하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삼손의 부모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동시에 보았으며, 사도 바울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땅의 형체를 가진 자가 하늘의 영광을 보았기에 죽은 자처럼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이 긍휼을 나타내시면서 계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것을 보고 너무 좋아서 세상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그곳에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산 밑의 가족이나 다른 제자들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영광보다는 이 세상의 영광이 좋사오니 하면서 이 땅에 눌러 앉아 살고 싶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는 눈이 멀었다가 삼일 만에 아나니아가 기도함으로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았던 세상의 영광,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이룰 수 있다고 여긴 그 영광들이 배설물이며 해로운 것임을 알고 십자가의 영광만이 참된 영광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하나님의 시각이 열린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삶을 살아 갈 때가 많기에 그 시각을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 그 영광을 보았는데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고 합니다. 도저히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오늘 본문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고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계속하여 대비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썩을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성형수술을 하여도 썩을 것입니다. 이렇게 썩어가는 것을 방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이 자기 몸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 옛날에는 불노초를 구하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과학시대라 복제를 하면 된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그것을 이루어 보려고 난리인 것입니다. 난치병 환자를 위해 줄기세포를 성공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 혜택이 필요한 난치병 환자의 절대다수는 가난하여 그 혜택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몸을 더 건강하고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사용될 것이기에 엄청난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기술이 복제기술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지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썩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은 썩을 것이며 계속하여 썩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육의 몸이 있기에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신령한 몸이라고 하여 유령 같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이 믿지를 못하고 영인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유령이 나타난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져 보라고 하시면서 음식도 드셨습니다. 부활한 몸은 만질 수 있고, 음식도 드실 수 있는 형체가 있습니다. 부활하셔서 영광의 몸이 되신 것은 바울 사도가 보았고,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기록합니다. 그 영광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슨 몸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까?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5-49)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산 영이란 스스로 살수가 없고 누군가가 살려주어야만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아담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이 범죄 함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다 범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살리려고 해도 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담의 후손은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살려주는 영이 되기 위해 흙에 속한 형상으로 오셔서 죽으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늘에 속한 형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믿는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 우리의 소원

그 영광을 본 바울 사도의 삶의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몸을 떠나 영광의 몸을 입기를 그렇게 소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빨리 죽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서 죽지 못한 것이지 자기는 소원이 하루라도 빨리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바울이 사모한 그 죽음을 우리도 사모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 자신은 죽음에 계속하여 넘겨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1-24) 이 말씀이 부활을 믿는 바울 사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말씀을 한 곳 더 보겠습니다. 같은 빌립보서 3장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18-21) 십자가의 원수는 땅의 일을 생각하고 땅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냥 죽지 마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에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비참해지고 자존심 상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자존심을 죽여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하여 이 일을 이루시는 일에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이시기에 우리를 죽여서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낮을 몸을 그의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실 그 주님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영광의 주께서 우리와 함께 죽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산 다음에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이 다릅니다. 그 영광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실존하는 나라이며 진리입니다. 그것을 믿기에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소망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 살려주는 영이신 주께서 함께 하사 다시 살게 하여 함께 그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들에게 있기를 원하며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 우리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혈육의 모양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말씀 시간에 졸렸던 경험을 이야기 해 보고 또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주를 믿음으로 갖게 된 우리의 시각과 그 시각이 내게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아담의 후손에 속하였다는 것과 예수님에게 속하였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5. 바울의 소원은 무엇이며, 우리도 같은 소원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시고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6.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은 무엇이며, 주님과 함께 죽은 것은 무엇입니까?

7.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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