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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 안에서의 환난과 위로

본문 / 고후 1: 1-11

 

 

1. 위로와 저주

2012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한 달이 되었고, 지난주에는 민족의 명절인 ‘설’도 지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지난 한 달 동안 제일 많이들은 말이 있다면 아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닐까 싶습니다. 새해에는 뜻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고 건강하고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복을 받기 위해 착한 일도 하고, 종교도 가지고, 신도 찾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인 우리도 방금 말한 것들을 복이라고 여기고 여기에 모였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을 덮어버리고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위로가 과연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위로가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중 그 누구도 복음을 인하여 그 당시와 같은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기에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드러나지가 않아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복음으로 인한 핍박과 고난이 우리 중에도 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아마 오늘 본문의 말씀이 크나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어느 선교회에서 매달 나오는 소식지를 보면,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도망 나왔다가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서는 다시 성경을 들고 가서 죽더라도 이 복음을 전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내 눈이 주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는데도 그런 고백을 하면서 주님도 사도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어 온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늘의 말씀은 감격과 감사와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지금 세상의 것으로 세상의 영광을 더 가지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해한다면 이 말씀은 위로가 아니라 저주의 말씀으로 들릴 말씀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욕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렘6:10) 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주께로 돌아오라고 심판의 경고를 하는데 그들은 그 말씀을 자기들에게 욕하는 것으로 듣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육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지만 영적으로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영적인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오늘 읽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아니면 욕으로 들리는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알 것입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복음을 인한 고난이 있는 사람이라면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틀림없이 욕으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나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말씀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2. 고난의 신비와 위로

먼저 고린도후서의 배경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디도 편에 보내고 나서 바울 사도는 그 반응을 염려하면서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디도를 만나서 들은 소식으로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 문제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어떤 문제를 변호할 때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문제가 바울이 떠나고 난 뒤의 고린도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개시키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흠잡으며 하는 말이 사도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면 바울이 전한 복음도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주장합니다. 단지 자신의 권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1:1-2)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이단이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고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인줄 알고 열심을 다하였던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를 잡으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혀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가 된 자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교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섭섭하게 행한 일들이 여러 가지 많이 있습니다. 그가 개척하여 세운 교회인데 바울이 다른 곳으로 가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바울을 모함하여 사도가 아니라고 하고, 언행일치가 안 된다고 하고, 사례는 받지 않으면서 예루살렘에 보낼 헌금을 하라고 독려하니 그것을 떼먹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응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사도됨이 이런 모습 가운데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바울은 지금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송하리로다’ 하며 찬송이 먼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당하고 있는 환란과 핍박과 고난도 자기 자신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도로서 받는 환란과 핍박과 고난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환란과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은 그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깨닫고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다음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5-6)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위로를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를 알게 됨으로 그 고난이 무슨 고난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의 성도들에게 넘겨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거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서 결과 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야적 고난’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하는 고난도 복음으로 인한 무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고난으로만 끝나면 힘이 들겠지만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므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위로로 인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고 위로하는 중요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의하면 위로 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고난을 주지 말고 위로만 주면 안 됩니까 하는 것입니다.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하시냐고 따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마귀가 세상의 영광으로 유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마귀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보호할 것이라는 것과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물리치시고 십자가의 고난의 길로 가셨습니다.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능력과 세상의 영광을 다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유혹은 얼마든지 임하는 것입니다. 네가 능력 있는 주의 종이라면 기적을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이런 요구들이 끊임없이 온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바울 사도의 답변은 ‘내가 보여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환난과 고난과 핍박과 버림받음입니다. 세상에서의 버림 받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모습이 십자가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절규를 하나님은 외면하신 것입니다. 죄인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그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모습입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이루신 것입니까? 히브리서 5장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5:8-10)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체험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함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도를 위한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또 그렇게 고난을 통한 순종을 친히 체험하신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을 이루셨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3. 고난을 보는 시각

그러므로 성도가 고난을 당할수록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로도 넘치게 됩니다. 자기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면 채울수록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유익과 혜택을 얻고 살아나는 교회들을 보며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가셨듯이 우리 또한 그 길을 걷고자 하는 믿음과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지금 내가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으로 인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들이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서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침과 같이 그리스도의 위로도 넘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야고보서 1장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되셨다는 것을 성도가 고난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십자가 안에서 온전한 용서와 구원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 고난이 없고 세상의 영광이 주어지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예, 없습니다. 그런 방법은 마귀가 제시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만 알아채도록 감추어둔 방법이 고난의 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좁다고 불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도 우리 앞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 좁은 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지 않지만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고난으로 포장해두었지만 그 속으로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어느 정도로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지푸라기조차 치워버리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죽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위로요 소망이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다른 성도에게 위로를 주기 위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나중에 나와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형제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겪은 그 일을 하나님은 하나도 버려지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후에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자에게 이미도 그 길을 겪고 이긴 자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나눌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을 바라보는 성도의 시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인 것처럼, 자신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도 그런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성도들은 세상의 환란이나 고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두려움은 환란이 닥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환란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온전하게 드러나게 할 뿐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환란 중에 위로와 소망이 더욱 든든해 질 뿐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더욱 견고하게 내려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찬송이 오늘 고린도후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항상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본문의 말씀이 듣는 자들에게 위로와 저주로 나눠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바울은 왜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하는 극단적 인 표현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것입니까?

3.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행한 섭섭한 일과 바울의 사도됨은 무엇입니까?

4. 바울이 복음으로 인한 환란과 고난 가운데서 깨달은 것과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환란과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그것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위로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고난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시각은 어떠해야 합니까?

7.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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