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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질그릇에 담긴 보배만을 위하여

본문 / 고후 4: 7-12

 

 

1. 인간의 현실

인간들에게 있어 생로병사, 즉 태어나서 늙어가고 병들고 죽는 문제는 그 어느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종교라는 이름과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이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여 자기가 도를 닦아서 그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가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는 없어도 스스로 죽을 수는 있다고 하면서 자살하는 철학자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섰는데 최근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줄기세포 복제의 문제가 결국은 생로병사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 생로병사의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고린도후서 4장에서 5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육체의 낡고 늙어가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거기서 더 나아가 죽음 후의 심판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약함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질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질그릇은 깨어지기 쉽고 약한 그릇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 범죄한 인간을 향하여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기에 인간은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인간이 흙으로 사는 동안은 어떻게 살게 되는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90편입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12) 이 말씀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범죄 하여 생명나무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들의 현실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땅의 티끌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은 그 평생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자신의 날 계수함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편 90편에 나타난 인간의 실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질그릇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그릇인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나면 질그릇 그대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질그릇이 보배로 바뀌게 되는 것인지 그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보배와 질그릇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서 내가 무슨 이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가장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도 보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고 말씀함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정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잠깐 뿐인 보이는 것에 주목하기 보다는 영원한 것인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사는 늘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갑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복을 받았다고 간증할 때에도 대부분 그 복이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지고, 육체가 건강하여 지고, 자신이 소원이 이루어지고, 이 땅에서 성공하였다는 것들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이런 내용들이기에 지금도 예수를 믿고서 문제를 해결 받고 복 받으라고 하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고 병이 들게 되면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아닌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고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이 보배는 다름이 아닌 세상 사람들이 다 싫다고 버려버린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6절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바로 우리의 보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천지만물의 창조의 목표입니다(골1:16절 참조). 그 예수님이 보배이며 나머지는 그 보배를 빛내기 위하여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성도라고 하여도 그 겉모습은 질그릇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다른 성질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부터 점점 더 나아지는 질그릇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라! 내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성공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본능이 있는데다가 설교시간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세뇌를 받고 있기에 성경의 말씀과는 정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표현대로 하면 바로 수건이 가려져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예수를 믿어도 질그릇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연약하고 더 깨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 능력이 질그릇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라고 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합니다. 답답함을 당합니다. 핍박을 받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마치 다윗이 도망 다닐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이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 싸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시원하게 해결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질그릇이 사방에 싸여서 꼼짝을 못하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옥에 갇혀서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자신은 갇히지만 복음은 갇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싸이지 아니함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답답한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 주님께 있으니 낙심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모습이라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여 망한 것으로 보이지만 버림을 받거나 망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질그릇을 보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보배를 보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와 땀을 보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과 부족과 실패와 범죄도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이란 자신의 연약함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강함이 드러나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이 모든 어려움을 다 당합니다. 심지어 날마다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러하였으며 다른 사도들도 그렇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을 능력이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능력인 것입니다. 이 능력이 질그릇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11)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 즉 십자가를 몸에 짊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허락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항상 주님과 같은 십자가의 삶, 즉 이웃에게 유익과 혜택을 주기 위해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좇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허락 되어진 그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십자가의 고난의 길은 패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삶을 통해 표현하고 소유하게 되는 승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약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넘겨진다면 그것은 곧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죽을 육체가 영적인 생명의 통로로 쓰임 받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부터 내가 세상에서 보란 듯이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 나는 죽었다고 복창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죽음에 넘겨버리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지 이미 죽음에 넘겨진 자 임을 아는 사람은 좀 수월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삶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참 능력이시고 보배 되신 주님의 위대함이 선포되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주 앞에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밟으면 밟힐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렇게 밟히면서도 바보처럼 웃고 있으니까 정말 바보인줄 알고 더 밟게 되지만 우리는 그렇게 밟으면 밟을수록 질그릇 안에 보배는 더욱 더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에 넘겨지는데도 상대방을 향하여 축복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드러내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3. 보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보배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에 포장지가 너무 좋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보배보다 상자가 더 좋으면 안 되기에 보배만 보배답도록 하기 위하여 그 보배를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담아 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질그릇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보배 때문에 연약한 질그릇을 구원하시는 것이지, 질그릇이 좋아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연약함에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죽을 육체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시려고 우리를 날마다 죽음에 넘기십니다. 발악을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 죽기 싫다고 소리 질러도 밀어 넣으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밀어 넣고 계시기에 실패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가 성공하려고 또 멋있어지려고 치장하면 할수록 더욱 더 피곤할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마지막 하나님 앞의 이력서에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질그릇인 우리가 세상 것으로 좀 치장을 하면 빗살무늬 토기는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아무 무늬가 없는 무문토기냐 아니면 잔뜩 치장한 빗살무늬 토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약한 질그릇으로 빚으신 것은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 질그릇이 약하고 깨어지고 부수어져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질그릇이 깨어짐으로 그 안의 보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죽음에 넘겨서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함을 나타내시는 그 주님과 사귀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셨다면 질그릇 된 우리 자신을 다른 무엇으로 치장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멋지게 치장을 해도 결국 그 질그릇이 깨어져야만 그 안에 보배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라면 이미 깨뜨려지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유익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다면 오늘도 주저하지 말고 주 안에서 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깨어져서 내 안에 보배만 자랑 될 수 있다면 주저 말고 그 길을 가시기를 바라며, 내가 죽어 주님께 영광이 되고 또 이웃들에게 유익과 혜택을 나눌 수만 있다면 기쁨으로 그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예원 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의 고민인 생로병사에 대해 종교 철학 과학 그리고 성경은 무엇이라 합니까?

2.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릅니까?

3. 예수를 믿어도 질그릇은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연약하고 더 깨어지는 모습으로 나타 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우리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 입니까?

5.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능력은 무엇이며,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뜻은 무엇입니 까?

6. 우리의 연약함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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