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0,756
오늘 : 175
어제 : 280

페이지뷰

전체 : 78,737,871
오늘 : 965
어제 : 1,339
조회 수 136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과 같은 믿음

본문 / 고후 4:13-18

 

 

1. 믿는 고로

오늘 본문을 보면 구약의 시편 116편 10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믿었으므로 말하였다’고 하여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편 저자에게 환란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이 구원의 확신을 준 것처럼 바울과 같은 전도사역을 하며 고난을 당하는 모든 이들의 그 사역에 대한 근거가 바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었으므로 말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하면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는 것이기에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현실에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 해도 그리고 더 나아가 죽임을 당한다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죽음도 상관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죽음을 반기며 빨리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하는 자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며 질그릇에 보배가 담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에 대하여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합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평소에 소망하는 것을 바라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바라본 믿음의 내용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 바라본 믿음의 실상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었다면 죽어도 좋다는 것이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하는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가 바로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가 되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의 본향을 생각하면서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버렸습니다. 애굽의 모든 금은보화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를 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거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이런 모습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신약의 사람들이 아니라 구약의 사람들입니다. 흔히 우리는 구약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복을 말한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음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소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게 된다고 하면 과연 누가 믿으려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진정으로 믿음으로 말한다고 하면 바로 이런 것을 말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 교회로 오겠느냐며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믿음이 없는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믿음을 말하지만 실상 그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엉터리 믿음인 것입니다.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기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고로 말한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이 시편 116편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1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116:15) 여기서 경건한 자들은 바로 성도를 말씀합니다. 즉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는 것입니다. 심히 곤란을 당하다가 구원받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하게 보시기에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하지 아니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내가 살아남는 것이 진리라고 하는 세상입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인정하는 세상입니다. 결국 내가 살아남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위하여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심지어 죽이는 것까지도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진리라고 여기며 적자생존 또는 밀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밀림의 사나운 짐승들도 자신의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연약한 짐승들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배가 고프면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자기 배가 불러도 또 다른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바로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2. 믿는 자가 할 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더 평화롭게 만들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단절되고 새로운 세계가 와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세상이란 것이 인간이 상상하거나 노력하여 이루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세상의 서로 해치고 상하게 하는 현실에서 다시는 해함과 상함이 없는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말한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이 세상은 밀림의 법칙이 통용되고, 인간 세상에는 밀림보다 더한 법칙으로 남을 죽여야만 살아남는 그런 세상인데 어떻게 해함과 상함이 없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까? 여호와 증인들은 이 말씀을 그림으로 그려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면 이런 지상낙원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면 그 세상이 바로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지식이 충만한 그 거룩한 산이 어디에 있는 것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그 앞의 말씀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11:1-5)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 10장에 있는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처럼 위용을 자랑하던 세상의 급속한 몰락과 미미한 그루터기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 메시아 왕국이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그 싹은 메시아이며, 그는 이새의 줄기 곧 다윗 가문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여기 ‘다윗’대신 ‘이새’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로부터 나올 싹이 다윗 이전의 지위, 곧 목자였던 그 아버지 이새가 상징하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메시아는 무너진 다윗 가문에서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오실 것이기에 그는 비천하고 멸시받는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는 자라서 열매 맺는 장성한 나무로 발전할 것이라 하여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다스리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고로 말하는 사람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 시편 기자만 믿었으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믿었으므로 말한다 하여 너희가 믿는 자라면 이 말을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믿는 자가 하는 말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또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바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4:14)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을 안다고 합니다. 결국 믿는 자의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안에 성도가 함께 포함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다 그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가 말하는 것이요 믿는 자의 소망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1-10) 우리가 다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혀놓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심에 성도가 함께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할 말은 하루라도 빨리 몸을 떠나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가 믿음으로 할 말인 것입니다.

 

3.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며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가운데 통용되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이러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세상에서도 만사형통하다고 합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은 이미 확보하여 놓았으니 세상에서도 복을 받아서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복을 받는 것이라고 내세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려고 교회로 몰려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마귀에게 속고 있는 증거입니다. 결코 믿음으로 말하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4:15)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라고 말합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나처럼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연약함과 주림과 사형선고를 받은 자처럼, 세상의 찌꺼기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상관이 없는 것은 바울은 믿음의 세계를 보고 있으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설 영광의 날과 부활의 세계가 없다면 믿음으로 사는 자가 가장 불쌍할 것이라고 이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오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안에 들어있는 성도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그 나라를 사모하며 기다리게 되는 것이기에 결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썩어지고 사라지고 없어질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하는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여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는 것이 은혜이며 이런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환영한다고 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합니다. 이는 저희 행한 일이 따른다고 합니다. 그 행한 것이 무엇인가는 오늘 본문 18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보이는 것을 위하여 살았는가 아니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위하여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보이는 것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고 또한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이 장차 없어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그 해함과 상함이 없는 나라를 얼마나 바라보고 사모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기에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6-17)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며 환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경한 것입니다. 더 중한 믿음의 세계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잠시 환난에 넘기시는 것입니다. 그 잠시 받는 환난이 어떤 사람에게는 오랜 세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길어도 7-80년 안에 끝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에 비추면 그 환난이란 밤의 한 경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믿음으로 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마지막으로 로마서 8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18-25) 아멘! 이 말씀으로만 소망 삼아 비록 몸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산다 할지라도 우리의 신앙만큼은 보이지 아니하는 세상을 향하여 늘 기대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예원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믿음으로 말하는 자들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2.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거짓된 엉터리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3. 선지자들이 꿈꾸고 예언한 해함과 상함이 없는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4. 오늘날 믿는 자가 말하는 것과 믿는 자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5.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한 일은 무엇입니까?

6.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환란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3 6월 20일 2부 /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우리의 신앙 관리자 2010.06.19 1402
572 1월 30일 1부 / 그리스도의 날에 견고하게 하시리라 관리자 2011.01.25 1386
571 8월 29일 1부 / 오해된 신앙과 합격점을 받는 신앙 관리자 2010.08.28 1385
570 5월 13일 2부 /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관리자 2012.05.19 1384
569 1월 6일 2부 / 능히 서게 하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1 관리자 2013.01.21 1384
568 11월 14일 2부 / 우리를 변화시키는 십자가의 능력 관리자 2010.11.12 1376
567 2월 20일 2부 / 십자가의 도와 우리의 자랑 관리자 2011.02.18 1373
566 3월 4일 2부 / 새 언약의 일꾼과 영원한 영광 관리자 2012.03.04 1373
565 10월 10일 2부 / 빌라도와 같은 판결을 하며 사는 우리 관리자 2010.10.09 1371
564 6월 17일 2부 /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관리자 2012.06.16 1364
» 4월 1일 2부 /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과 같은 믿음 관리자 2012.04.04 1362
562 11월 13일 2부 /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노니 관리자 2011.11.13 1360
561 11월 6일 2부 /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섬기는 자 되라 관리자 2011.11.06 1359
560 10월 24일 1부 / 십자가 현장에서의 거룩한 음성 관리자 2010.10.24 1357
559 3월 3일 2부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관리자 2013.04.10 1351
558 12월 16일 2부 / 꿈꾸는 사람들은 화 있을 진저 관리자 2012.12.16 1344
557 10월 3일 1부 / 진리를 듣고도 육신적은 삶을 사는 자 관리자 2010.10.02 1339
556 8월 22일 2부 / 자녀 되고 지체된 우리에게 요구된 신앙 관리자 2010.08.21 1337
555 9월 12일 1부 / 하나님께 붙잡힌 우리의 운명 관리자 2010.09.11 1334
554 4월 3일 2부 / 하나님의 것이 된 우리의 자랑 관리자 2011.04.02 1322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