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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활의 도와 그 도 전함을 싫어하는 자들

본문 / 행 4: 1- 4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4:1-4)

 

 

1. 불편한 십자가와 부활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이방 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비교해 보면 기독교보다는 이방 종교인 다른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들이 인간의 이성적 생각으로는 훨씬 더 접근하기가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은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하여 이해하기가 불편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그 세상을 한순간에 멸망시켜 버리는 이야기나, 뱀이 인간을 유혹하고 유혹받은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처럼 건넌 이야기, 물이 없는 광야에서 반석을 치자 물이 나온 이야기,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이야기, 전쟁 중에 해가 멈춘 이야기 등 그 어느 하나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가 매우 불편한 것들이고 도리어 희랍 신화처럼 하나의 신화로 이야기할 만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또 하나의 종교인 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매우 합리적인 내용으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 가르치는 것들 하나하나는 인간으로서 새겨들어야 할 내용으로 얼마든지 인정되고 이해되는 것들입니다. 불교는 자기 내면의 정화를 위한 도를 가르칩니다. 자기 내면을 정화하여 불심을 회복하는 것이 곧 이생에서의 모든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말하는 것은 ‘믿으라’가 아니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무조건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납득하여, 그 가르침이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자기 안에서 철저히 이해하고 그 가르침대로 따르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따라서 받아들이기에 불편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진리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나 이성과 조화되지가 않습니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내용이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사실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종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 그것은 인간이 불편해 할 수 있고 또 부딪힐 수 있는 걸림돌을 제거한 내용, 즉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아닌 인간적인 다른 십자가와 다른 부활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 기독교의 실상이라는 것 또한 생각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로마제국이 국가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흉악범을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처형방식으로 죽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길을 가셨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바로 그 십자가를 구원의 길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십자가라는 처형 방식이 없기 때문에 전혀 부담 없이 십자가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말은 불편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 십자가라는 처형 방식이 없다고 해서 십자가에 대한 불편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지향하는 것이 곧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곧 구원의 길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행복을 지향하며 그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의 행복 자체를 부인하고 하늘의 복을 가르치셨고, 그 복의 길을 가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을 지향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지금도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이 싫은 사람들

그러면 십자가 후의 부활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행4:1-2)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부활의 도를 싫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부활의 도를 왜 싫어하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한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고 그들에게 베드로가 설교를 한 내용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라고 하면서 너희가 죽인 생명의 주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시고 다시 살리셨는데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했다고 하면서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는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하여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도행전 3장의 설교를 보면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3:25-26)고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한마디로 하나님이 언약의 자손인 너희를 사랑하셔서 복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으니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죽였으니 모두 지옥 갈 것을 각오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앞에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행3:17)고 말씀합니다. ‘너희나 관원들이나 모두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주라는 것을 모르고 한 것임을 안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 모든 죄를 용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싫다고 사도를 붙잡아 가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싫어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가 죄로 드러나고 그것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 이 사람들은 모두 유대교 안에서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힘으로 인해서 백성들의 중심에 위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죽인 것을 두고 회개를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체면과 자존심이 손상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도가 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부활의 도와 죄

이런 원리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과연 이 부활의 도를 싫어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우리 영혼을 영원한 사망에 가두어 버리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악한 세력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악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죄의 종으로 죄 가운데 살면서도 꼭꼭 감추고 죄 없는 척 함으로써 자신의 인격적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우리의 옛 본성 때문입니다. 부활의 도를 싫어하는 그들에게 있어 죄는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 감추어야 할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죄가 자신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부활의 도가 전해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부활의 도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도가 잘못된 것이기에 싫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활의 도가 옳다고 해도, 더 나아가 그것이 진리라고 해도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고 자기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기에 부활의 도가 싫은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고 모두 틀린 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들을 싫어하고 붙잡아 죽인 것이 아니라 말씀들 하나하나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4-5)고 하여 빛이신 예수님이 어두운 세상에 왔으되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니 깨닫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고 합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빛 가운데 나가면 드러날까 봐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 싫어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잘못된 가르침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적인 삶에 거추장스럽고 방해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 즉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와 성공을 기대하며 사는 신앙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을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서도 고난주일이라며 십자가의 고난을 외치고, 부활주일이라면 부활을 외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부름을 받을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며,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도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한 의인은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여김 받은 자가 아니라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고 싫어하며 항상 의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의 방식은 이러한 의인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깊이 깨닫고 죄인임을 받아들이며 생명의 주를 바라보는 그들만을 부르시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현실에 안주하게 하지도 않고, 우리의 체면과 자존심을 세워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추구하고 붙들고자 하는 모든 것을 부수어버리고 붙잡고자 하는 그 손을 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생명의 세계에 그 마음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는 세움을 입을 만한 가치가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만이 영광을 받고 세움을 받아야 한다는 고백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활을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죽은 몸이 다시 산다’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걸림돌도 없고 불편함도 없이 다가올 것입니다.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는 부활인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바로 이런 부활을 생각하면서 부활을 믿는다고 외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어쨌든 죽은 몸이 다시 산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기에 이런 부활은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자신이 곧 멸망에 이를 죄인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간의 의를 옳은 것으로 여기고 그 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체가 악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예수님만이 옳은 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 선 신자라면 오직 예수님만을 옳은 분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옳은 분이라면 예수님 앞에서 옳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나 같은 자를 멸망에서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운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이고, 부활에 참여하여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무릎 꿇고 자기의 죄인 됨을 끊임없이 자각하며 생명이신 주를 바라보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부활의 삶에 우리 모두가 초청 받았음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주님 앞에서의 삶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아 우리의 삶이 그냥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존귀한 부활의 삶이 되어 항상 생명이신 주 만 바라보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 기독교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방 종교는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나 지금이나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불편할 수 없는 이유와 그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베드로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4.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싫어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오늘날 예수님 당시와 같이 부활의 도를 싫어하는 자들의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우리가 좋아하는 부활의 도와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의 도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7.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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