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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본문 / 고후 5: 8-10

 

 

1. 힘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믿는 고로 말하며 믿는 고로 행한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믿는 고로 말하고 믿는 고로 행한다’는 것은 보는 대로 말하거나 보는 대로 행하지 아니함을 말씀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말하며 그 세계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우리 스스로가 믿을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셔야지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합니다. 모든 세계는 있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없는데서 창조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하고 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근원과 뿌리를 말씀하는 것이지 잠시 눈에 보이다가 사라질 것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사람들은 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로 나오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을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힘없는 힘’입니다. 힘없는 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 거룩하게 구별되는 힘인 것입니다. 하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 힘은 세상에서는 전혀 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무슨 힘이 나타났습니까? 날아오는 돌이 스데반 앞에서 방탄유리가 둘러친 것처럼 막아진다든지 아니면 돌을 던지던 사람이 도리어 자신이 던진 그 돌에 맞는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집사는 돌에 맞는 곳곳마다 온 몸이 깨어지며 힘없이 죽어간 것입니다. 그 모습을 세상에서는 힘 있는 모습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어떤 힘이 나온 것입니까? 바로 돌을 던지는 그들을 향하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힘없이 죽어가는 힘이 나타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도무지 알 수도 없는 힘이며 또한 낼 수도 없는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없는 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나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시기에 내가 기도를 하고 정성을 바쳐서라도 그 전능한 하나님의 힘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무시하던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우리가 바라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이런 힘은 세상에 보이는 힘입니다. 그런 힘을 얻기 위해 교회에 출석 하였는데 마침 교회에서 목사님이 그런 힘을 얻으려면 기도하고 헌금하고 정성을 바치면 하나님이 준다고 말씀한다면 그 사람은 그 힘을 얻기 위해 아주 열심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곳은 우상의 제단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믿는 고로 말하고 믿는 고로 행한다는 것’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 성도인 우리들도 함께 참여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힘이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힘이 없을 뿐 아니라 핍박을 받고 죽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 죽음을 환영하고 있는 자들이기에 그래서 소원하는 바는 자신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고 합니다. 내가 만약에 선택할 수가 있다면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괴로우니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고 편하게 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2. 기쁘시게 함

그렇다면 주를 기쁘시게 함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립보서 1장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0-24)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의 소원은 주님을 사랑하여 하루라도 빨리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보기 위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살아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난 후의 반응이 어떻게 나오는가하면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인데 내 마음대로 살다가 가자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나오는가 하면 그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무언가 열심히 하였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행한다고 해서 열심히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핍박이 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언가 열심히 한 것은 결국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기쁘게 하고자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 무엇을 위해 나온 것입니까? 우리가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설교를 듣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인지 점검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기 기쁨을 절대화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서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나왔다면 관심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나와서 주를 찾고 부르짖기도 하지만 과연 그것이 주님을 기뻐하고 사랑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어린 아이들이 제가 있는 당회장실에 자꾸 들어오고 싶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당회장실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목사님을 사랑해서 목사님께 가자고 하는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에 가면 과자도 있고, 음료도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까 자꾸 가자고 하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배당에 모이고, 주님을 위한답시고 이것저것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어려움이 닥치고 손해가 오고 핍박이 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마도 두 가지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 보았자 손해만 나는데 이제는 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또는 나도 오기가 있는데 복을 줄때까지 더 열심히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 예를 야곱의 얍복강의 씨름을 오늘날 기도로 비유하면서 끈질기게 매달리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오는 것은 종교요 장사요 거래이지 결코 성경에 말씀하는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소망은 빨리 떠나는 것이 소원이지만 그러나 떠나는 것도 세상의 괴로움을 빨리 벗어던지고 좀 편하게 살려고 떠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어차피 심판 받아 망할 세상이니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저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서만 살다가 간다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거하여도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부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5:8-14) 바울은 주 안에 있는 빛의 자녀들에게 이제 빛의 열매를 맺어야할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두움에 참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어두움의 세상 속에 살고 있어서 죄악된 생활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순히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를 넘어서서 ‘책망하라’는 강한 경고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말씀으로 책망을 받습니다. 이런 책망을 받는 빛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속에서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드러낼 때, 그 드러난 빛의 열매들은 어두움에 속한 자들을 조명하여 어두운 삶의 실체를 폭로하게 되고, 자신의 실체를 본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참 빛에 대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음으로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납니다. 속으로 숨겨둔다고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 앞에 말씀부터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5:1-7)고 합니다. 우리가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탐심이 우상숭배라는 말씀이 이곳에서도 나옵니다. 나의 탐욕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한 모든 것이 다 우상숭배이며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나타나서 주를 기쁘시게 하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3. 심판대 앞에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담이 되어도 그렇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보상이 있을 것이라 이야기하면 열심히 하려고 할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보상이 주어지고 이 세상에서도 복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면 주를 기쁘시게 하고자 덤벼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라면 주를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를 기쁘시게 하여도 어떤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간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고 하십니다. 이것이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인데 그런 믿음이 어떤 것인지 곧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7-10)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이라 고백하며 그 주인을 위해 한 일은 종으로서 당연한 일일 뿐이고 무익한 종으로서의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살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고서는 주님을 믿는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기쁘시게 한 그들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우리 모두가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 간에 행한 대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뿐이라고 여기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어떤 처분을 내리더라도 감사함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주를 섬겨 왔습니다. 모든 결정을 나 중심으로 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급한 자들입니까?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내 볼일이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급하고 중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기쁨이 중요한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쁨이 급하고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와 놓고는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 우리가 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시면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그 보이지 않는 약속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런 일들은 누가 시켜서 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다고 고백하는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기에 주인이신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과 믿음 위에 사는 자라면 우리가 떠나든지 거하든지 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매일의 삶 가운데 주를 기쁘시게 함으로 무엇을 하든지 그 하나님께 영광의 삶이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에게 허락된 성경의 믿음이 ‘힘없는 힘’이란 뜻은 무슨 의미입니까?

2. 우리 소원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할지라도 자기 사랑과 자기만족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우리의 신앙의 열심이 주 안에서의 열심인지 아니면 주 밖에서의 열심인지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4. 본성적인 종교적인 믿음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어떻게 분별되는 것입니까?

5. 바울이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를 넘어 ‘책망하라’는 경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누가복음 17장에서의 믿음의 종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7.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믿음의 사람과 아닌 자의 모습이 어떻게 다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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