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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본문 / 고후 5:11-15

 

 

1. 두려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다. 그것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동화들을 보면 주인공이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에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갈 수 있겠습니까? 당장 아이 낳고 양육하고, 공부도 시키고 학원에도 보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신데렐라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도 아주 행복하게 살고 싶고 그리고 그 행복을 영원토록 이어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히브리서 9장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으로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죽음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는 일에만 바쁘다 보니까 죽는 일을 생각하지 못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한 영이 죽음을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죽음은 소망 가득한 모습이지만, 세상에서는 그 죽음을 끝이요 실패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오직 희망을 말하고 성공을 말하도록 하지 실패나 약함이나 죽음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할 불편한 이야기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전도서 7장입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7:1-4)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이것을 우리의 마음에 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고후5:11)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두려움이란 바로 앞의 구절에 있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고 하는 내용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를 힘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럼 이 내용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한 주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셨습니까? 직장 생활을 하든지 가정생활을 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물으며 사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저 나의 만족과 나의 기쁨만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그러나 꼭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매일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주의 두려움을 알겠습니까? 그 주의 두려움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편 90편입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1-12) 주의 진노 중에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분노와 두려움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있다면 우리에게 허락된 날들을 그냥 지나가서 허비하는 삶이 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두려움을 바울사도는 알았습니다. 얼마나 두려운지 알기에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고 또 지금 우리들에게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5:11)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께 알려졌고 너희의 양심에도 알려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 전하는 자로 하나님께와 고린도 성도들의 양심에 알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받은 복음이 바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2. 강권하심

그런데 그런 바른 복음을 전한 바울 뒤에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런 바울을 비난하면서 바울이 전한 그 복음마저 변개시키려고 하기에 지금 다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고후5:12-13)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스스로를 치켜 올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을 두고 미친 것이요,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고후5:12-13 / 공동새번역)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다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고린도 성도들이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말합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만 있음을 증거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이 약할 때에 주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내가 약하여 지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능력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표시로 주님의 능력을 내 손에 쥐고서 행사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저주를 받는 것이 눈앞에 보이고, 누가 내 말을 들으면 복을 받는 것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대부분 성도들 속에도 다 들어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부 사람들이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이 교회를 떠나 살던 중 그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교회로 떠났던 사람들이 대부분 다시 그 교회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비록 목회자가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그 목회자는 주의 종이니까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우리가 주의 종을 거역했다가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축복과 저주를 당근과 채찍처럼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외모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말을 들음으로 복을 받았고 반대로 나의 말을 듣지 않다가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들도 역시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다가 잘 못 믿어서 자식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거나, 사업에 실패하였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마귀에게 매여 일생동안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다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런 자리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2:14-17) 우리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으면 안 되고, 나는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두려움인데 그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두려운 것은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이나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판단은 외모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로 심판하지 않고 누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였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과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예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와 부족을 아는 사람은 오직 주의 은혜만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지 않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얼마든지 넘어가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권고하는 말씀을 한 곳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1-4)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엄중하게 권고하는지 삼중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와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며,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끌리는 것은 그들의 사욕을 좇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역시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을 만나고 나니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여전히 저주받아 죽은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은 바울의 실력이 아니라 바울을 사랑하셔서 만나주신 주님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역시 이 십자가의 예수, 즉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줄 수 없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고 하시는 것입니다. 강권하신다는 것은 강제로 권한다는 말씀인데 난하주에 보면 ‘끄는 도다’라고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여기 있다 받아가라’는 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받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번역에서는 ‘휘어잡습니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없이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의 예수님께 우리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멸시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멸시함을 받은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바로 주의 사랑이 강권하시기에 그렇습니다. 주의 사랑이 그 십자가로 우리를 끌고 있기에 우리의 마음이 그 십자가에 끌리는 것입니다.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게 끌리듯이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신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우리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멸시함을 받은 그 십자가에 마음이 끌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 자기를 위하여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오직 주를 위하여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삶이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불행하십니까? 혹 불행하다고 느끼며 사신다면 우리들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해 보셨다면 잘 아시겠지만 누구든지 사랑에 빠지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우리 가운데도 나는 사랑하고 있는데도 불행한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있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을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데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그 사랑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맛보게 되면 그리고 그 사랑에 빠지게 되면 더욱 그 사랑을 흠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은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더 드리지 못하여 안타까운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마저 기꺼이 드리는 것이 바로 그 사랑인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이 우리에게도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십자가의 그 사랑에 이끌림 받는 성도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그 아름다운 뜻과 그 언약이 우리 통해 성취되고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만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삶이 그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매일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소원함 따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의 모든 범사를 통하여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 항상 선포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죽음에 대한 세상과 성경에서의 시각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2. 주의 두려움을 아는 것이 지혜인 까닭은 무엇입니까?

3. 바울의 자랑과 거짓 선생들의 자랑과 또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4.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과 성경에서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일에 예수님의 사랑의 강권이 필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끌림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7. 세상을 살며 불행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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