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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에게 허락된 영광되고 깊은 신앙의 세계

본문 /  요17: 4- 5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구하는 대목으로 신자인 우리들에게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 모델을 제시하사 소망을 갖게 하시려는 의도로 영광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요한복음 17장의 모든 내용들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적 기도로 아버지 앞에 구하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설명하고 깨우치기를 원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버지의 뜻에 모든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1. 영광 = 영생 = 하나님의 뜻

먼저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영광을 요구하고 계시며,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셔도 그것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고 아버지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구하고 계시는 것은 이 영광이 우리에게 소원이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요구하신 이 영광은 요한복음 17장의 모든 기도의 핵심이며 초점으로서 11절 하반절에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하였으며, 21절 상반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또 22절에서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우리 안에 있어 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하여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 이상 가까워 질 수 없이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로 곧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키며 부부가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하며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데는 동등한 수준과 위치 그리고 동등한 영광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요구하신 것은 우리 신자들도 그 영광의 자리에 가야 된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리고 그 영광은 하나 됨으로써 되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요한복음의 모든 초점이 그런 의미에서 하나 되는 것과 그것이 영생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6-11) 내가 온 것은 아버지께서 보내서 온 것이며, 저들을 아버지의 것인 줄을 알게 하는 것이며, 저들을 죄 중에서 꺼내 아버지의 것으로 하려고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켰음을 우리들에게 알게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시고 사랑을 베푸셨는가 하는 것 만으로가 아닌 그렇게 애쓰시고 사랑하시는 목표가 얼마나 대단한 영광을 가졌느냐를 확인시켜 우리로 항복과 예수를 믿을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하려고 그 영광을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광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기쁠 이유가 없는 자 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중 누구도 이 영광을 보고 확인한 다음에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이 영광의 약속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처음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셨던 그 영광을 신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이 우리들의 소원이 되고 소망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신앙인들은 이 같은 영광의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이 말 뿐이지 실제 생활 속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곁길로 빠지는 신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2. 세상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

바로 그런 이유에 대해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6-8) 여기에서 영광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붙어 있는 영광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 붙어 있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영광의 주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때 유대인들과 로마 관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이 세상의 눈으로는 납득이 안 가는 것입니다. 왕 같은 권세나 영광도 없기에 사람들이 볼 때에는 왕 다운 조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놀리고 희롱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광의 주라고 하십니다. 그 영광은 누구나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만이 알아 볼 수 있는 영광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영광도 세상적 차원에서 아무리 인식하려고 해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세속적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버려서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과 복과 능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해와 욕심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었듯이 신자의 모든 영광과 복은 세상적인 시각과 이해관계로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1-6)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즉 그 영광을 안다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있던 지식과 능력과 조건들을 개선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취리라고 하는 말씀이 천지 창조 때에 사용되었던 말씀인 것처럼, 중생과 믿음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그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물질계와 가치관으로서는 이 사실을 증명하거나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잘 하는 신앙의 실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속 받은 영광과 기적들을 세상의 일과 욕심과 환경과 그 시간 속에서 나타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격도 없고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구한 것은 모르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오해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거듭난 자이기에 영의 감각은 있어서 교회에 빠지지는 못하고 나오기는 나오는데 졸고 있는 신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 온 신앙의 대부분을 보면 언제나 나의 세상적 일과 욕심에서 구한 것이 응답받지 못한 데서 생기는 부작용들의 연속입니다. 내가 전혀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 주장과 욕구만을 요구하기에 일어나는 부작용들입니다. 그렇기에 신자가 보게 되며 누리게 될 영광과 복이 어떤 것들인지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3. 신앙의 세계로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신자의 영광과 복에 대해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3-14) 여기서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궁극적인 목표와 계획이 우리의 영광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제한입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죄를 따라 살지 않으며,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으며, 사망의 길을 걷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또한 동시에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부름을 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목표와 길을 잘 가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하며 거룩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있는 곳은 장례식에서나 병상에서나 찬송이 있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찌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이 찬송과 감사의 지위에 올려 놓으시고야말 하나님의 계획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실패하고 세상의 방해로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마침내는 자랑과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을 알기에 어떤 자리에게서도 감사와 찬송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잠시 근심하고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내가 당하는 일과 고통에 대한 표현이며, 나의 실수에 대한 안타까움일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차원에 있어서는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잘못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영광의 자리에 도달하도록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4-29) 바울이 이 일을 열심을 다해 하는 것은 이 일이 그에게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일을 하는 것이 큰 행복이었습니다. 우리는 고통도 없고, 일도 하지 않고, 죽을 때에도 고통 없이 죽으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 것 같은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편안해 지는 것만큼 해로운 것도 없습니다. 때를 따라 고통과 문제가 생기고 아픔이 있는 것이 우리를 성장시키며 복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내게 다가오는 시련과 시험들을 그냥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삶에 대해, 신앙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며 깨닫게 될 때에 그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속박을 당하고 희생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속박과 희생을 당한다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기에 기독교가 자꾸 가난해 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것이 다니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많은 희생과 제약을 받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가야 되고, 시험공부, 숙제도 해야 되고 때론 벌도 서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불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이 백세에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자,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여 산에 데려가 죽이려 합니다. 다니엘과 함께 포로로 잡혀 갔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치하에서 우상에게 절할 것을 거절한 것 때문에 풀무불에 타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죽게 되었는 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하시면 이 불에서도 건지실 것이요 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기에 풀무불을 가지고도 안 되는가를 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은 신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받은 유산과 약속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으며 또한 그것이 귀하게 보이지 않는 풍토 속에 있으면서도 그 게으른 신앙을 당연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희생만 강요하고 있는 정도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정도로 기독교가 가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맛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복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 일을 위해 죽음을 달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 할 수 있는 풍성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거나 짐승의 가죽을 쓰고 죽은 정도로도 이 영광을 생각하면 그것이 고통스럽다거나 억울하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본성적으로 우리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이 복과 영광을 찾으며 확인하며 늘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말씀과 기도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영어를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듣고 말하는 것이 영어밖에 없는 그래서 영어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어를 10년을 배워도 쓰지 않으면 미국 사람 만나면 알던 영어도 잘 나오지를 않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세상을 겉도는 신앙으로서는 십년의 신앙도 공전만 하는 신앙이 될 뿐입니다. 온전한 신앙의 세계로 그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야만 제대로 되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 자신의 신앙의 가난함을 위하여 슬퍼하시고 안타까워 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광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이 일들에 대해 우리가 가난한 것은 우리가 겉돌고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광과 복과 행복이 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기쁘신 뜻입니다.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이 풍성한 은혜의 세계로 더 깊이 힘차게 나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이 기도의 내용들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십자가 또 모든 권세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3. 영광의 주를 십 자가에 못 박은 이유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4. 우리를 향한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되고 이루어지다는 것은 뜻은 무엇입니까?

5. 우리 신앙이 가난해 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우리 신앙의 진전과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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