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9,987
오늘 : 253
어제 : 286

페이지뷰

전체 : 78,733,820
오늘 : 1,080
어제 : 1,883
조회 수 414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우리는 무슨 근심으로 살아갑니까?

본문 / 고후 7: 8-16

 

 

1. 근심

우리는 지난주에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에서 디도가 옴으로 위로를 받았다고 함을 보았습니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위로만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향하여 사모하고 애통하여 열심이 있는 것을 인하여 또한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바울사도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위로가 되고, 무엇이 그에게 기쁨이 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위로와 기쁨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후7:8)고 하여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잘못들을 인하여 바울사도가 사도로서 마땅히 책망할 것을 책망하였지만 그 편지를 받고서 고린도 성도들이 그 책망을 감당하지 못하여 받아들이지 못할까 하는 후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후회는 우리가 무슨 실수나 잘못을 하고서 하는 차원이 후회가 아니라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태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편지가 잠시만 근심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7:9)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가 그들로 하여금 잠시 근심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근심으로 인하여 회개함에 이르게 되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회개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가르치거나 책망해서 고쳐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린도교회가 책망을 받아들이고 근심하고 회개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디도를 고린도교회로 보내면서 자랑을 한 것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고후7:13-16) 디도가 고린도 교회에 가기를 어려워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바울사도의 권면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고린도교회가 과연 사도의 심부름을 하는 디도를 받아들일까 하는 염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를 자랑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디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자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자랑한 그 사실이 확인되었기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두려움과 떪으로 디도를 영접하여 순종하는 것을 보고서 디도의 심정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더욱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근심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염려하며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또는 세상에 속한 근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인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2. 회개를 이루는 능력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근심은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슨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거의가 세상의 근심과 걱정과 염려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책망을 받으며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가 스스로 신이 되어있기에 그 누구도 남의 간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근심하며 회개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고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는데 우리로 하여금 교훈과 책망 그리고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 중에 한 말씀이라도 우리의 본성에 고맙고 감사하고 기쁜 내용이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스스로 신이 된 자들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교훈 받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책망을 받고, 바르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틀렸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 받는다는 것 자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로 교육하는 이런 성경의 말씀을 달게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인 고린도교회가 사도의 책망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의 능력이 아니며, 고린도교회의 능력도 아닌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하고 회개하게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일어난다면 읽는 자나 전하거나 듣는 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증거인 것입니다. 시편 8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 주의 대적을 물리치시는데 어린 아이와 젖먹이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성취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좇으실 때에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분노하면서 예수님께 저 소리를 듣고 있느냐며 따지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적이 없는냐”(마21: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왜 어린 아기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대적을 물리치시는 것입니까? 그 능력이 사람의 능력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책망할 때도 자신이 높은 사람이라는 위치에서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은 사도이며 당연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을 비천한 자이며,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며,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간 것도 아니고 젊은 디도를 보냈으니 바로 어린 아기와 젖먹이의 모습으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두 사람 다 두려움과 후회와 염려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책망하거나 틀렸다고 말할 때에 어떤 자세와 태도로 하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언제나 잘 하는 것을 가지고 남이 못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어가지고 그것도 못하느냐고 합니다. 목사가 되어가지고 그것도 못하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그 부분에서는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신앙이나 삶을 이야기 할 때에 언제나 잘하는 자기와 잘못하는 남과 비교를 하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그것도 못하느냐고 합니다. 특히 목회자들이 교훈하는 모습이 대부분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설교를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흔히 누가 말이 좀 길어지고 훈계조로 흘러간다 싶으면 하는 말이 ‘또 설교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잘하는 것이 별로 없어서 누군가를 책망할 사람이 못 됨에도 불구하고 간혹 제가 한 설교를 들어보면 자기는 무엇이나 잘 알고 잘 하는 것처럼 건방진 태도로 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들어보면 더 잘 알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남의 책망을 듣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기에 더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설교와 책망에 누가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전하는 자의 능력도 아니며 듣는 자의 능력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3. 바른 회개

고린도교회가 바울사도의 책망의 편지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회개가 어느 정도로 일어났는지 오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얼마나 간절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변증이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변명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였다고 그러나 이제는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하는 변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잘 몰랐고 마귀에게 속았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러한 변명을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한지를 표현하기 위해 계속하여 ‘얼마나’ 라고 하는 부사를 붙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에게 속아 하나님의 뜻대로 회개하지 아니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없고 세상의 근심만 하고 살았던 것이 분한 것입니다. 자기 잘난 체 하고 외모를 중시하면서 살았던 것이 분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나타나야할 모습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분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를 죄로 알지도 못하며 죄를 즐거워하였던 것이 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두려워하며 디도를 영접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직접 온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바울의 심부름꾼인 디도가 왔음에도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두렵게 디도를 맞이하였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고후7:15) 저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디도를 영접하고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영접은 바울사도를 영접한 것이며, 이 두려움과 영접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영접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높은 사람이나 권세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두려워하고 영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찌끼 같은 대접을 받고 온갖 고난을 다 당하는 바울의 심부름꾼을 두렵고 떨며 영접하고 순종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즘 우리는 방송과 인터넷을 통하여 다른 교회 다른 목회자의 설교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들을 때마다 여러 평가들을 하실 것입니다. 물론 저에 대한 평가는 제가 듣지 않는 곳에서 하시겠지만 우리는 누구의 설교를 듣든 평가를 합니다. 누가 얼마나 잘하는가 하는 것을 비교해 봅니다. 누가 더 복음적이고, 누가 더 구속사적 해석인가를 평가합니다. 마치 연예인들의 공연을 보듯이 합니다. 누가 더 연기를 잘 하는가, 누가 노래를 더 잘하는가 하는 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요즘은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쉽게 접하다 보니 마치 연예인 공연 보듯이 평가하는 어리석은 습관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종으로서 듣는 자들이 아니라 평가자로서 논하는 위치에 서 있는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린도교회와 비교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알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겔 33장입니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겔33:30-33) 입술로는 복음이 좋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이익을 좇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이런 간절한 회개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그만 평가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 앞에 나의 무릎을 꿇릴 수 있는 아름다운 돌이킴이 우리의 모든 범사 가운데 일어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들은 잠시 잠간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그 나라를 믿는 자들이라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아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단지 미래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이미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 끝난 세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 끝난 세상의 것으로 하는 세상의 근심은 사망에 이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을 하게 됩니다. 그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 근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듣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회개의 역사가 그래서 더욱 더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울사도가 자신의 책망으로 말미암아 후회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내용과 그것이 바울의 자랑의 기쁨이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사람들이 그 누군가의 간섭을 싫어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그 대적을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물리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말씀을 듣고 돌이키고 회개하는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인 까닭은 무엇입니까?

6. 고린도교회가 디도를 분해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영접하였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7. 오늘날 성도들의 어리석은 습관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12 11월 10일 / 디도서3. (딛1:5-16)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삶 104 관리자 2013.11.10 4313
» 7월 1일 2부 / 우리는 무슨 근심으로 살아갑니까? 212 관리자 2012.07.01 4149
710 3월 10일 1부 / 그림자를 놓고 실체를 붙드는 신앙 79 관리자 2013.04.10 3940
709 2월 9일 / 사도행전6. (행1:15-26) 직무를 버린 유다 대신 직무를 맡은 맛디아 141 관리자 2014.02.26 3874
708 2월 23일 / 사도행전8. (행2:5-13)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방언 54 관리자 2014.02.26 3858
707 12월 22일 / 디도서8. (딛2:15-3:8) 은혜로 사는 자가 가져야 할 두 가지 인식 185 관리자 2013.12.22 3683
706 1월 12일 / 사도행전3. (행1:6-8) 증인들이 전해야 할 증거의 내용 121 관리자 2014.02.26 3632
705 1월 3일 1부 /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관리자 2010.02.06 3383
704 3월 25일 1부 / 질그릇에 담긴 보배만을 위하여 265 관리자 2012.03.25 3196
703 2월 21일 2부 /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관리자 2010.02.20 2962
702 1월 31일 1부 / 신자 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존재 가치 152 관리자 2010.02.06 2918
701 1월 24일 1부 / 하나님이 계획하신 우리 구원의 완성 관리자 2010.02.06 2784
700 1월 17일 2부 / 너희 마음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관리자 2010.02.06 2737
699 3월 27일 2부 / 우리의 터와 우리가 쌓는 공력 331 관리자 2011.03.25 2734
698 2월 7일 2부 / 하나님의 영광 우리의 영광 관리자 2010.02.06 2711
697 3월 2일 2부 /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위해 오신 예수님 관리자 2010.03.06 2679
696 4월 11일 /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가 가지는 신앙 관리자 2010.04.10 2645
695 2월 28일 1부 / 우리에게 허락된 영광되고 깊은 신앙의 세계 관리자 2010.02.27 2643
694 8월 7일 2부 /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50 관리자 2011.08.13 2635
693 2월 14일 1부 / 하늘 권세 아래 사는 우리의 삶 관리자 2010.02.11 262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